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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 3693
2014.07.11 (10:25:46)

 

성지순례/ 2013. 9. 17-27

 

 

1. 금년 봄 홍천 엘림타미드 불가마에서 있었던 임원수련회에서 과거에는 홀리클럽이

해외지부 개척 등으로 해외여행을 많이 하였는데 최근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는

반성적인 차원에서 금년에는 성지순례 여행을 가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서울홀리클럽

회장인 나에게 그 계획을 실행할 임무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런 행사의 기획력이 떨어지는 나는 여행 계획을 진행하는데 부담을 가지고

있던 차에 염영수 공동회장에게 그 임무를 부여하였더니 여행사를 알아보는 일 등을

열심히 수행하여 주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성지순례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인원이  20 명은 되어야 하는데 서울 홀리크럽회원중에는 성지순례를 몇 번 다녀온 분도 있고, 10    일 이상 시간을 내고 1인당 300만 원 이상의 비용을 부담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분도   많지 않아 인원을 채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여행지의 하나인 이집트에서 7월 경부터 데모가 일어나 많은 인명피해가 있다는 뉴스는 성지순례를 가고자하는 의욕을 상실시켰고, 당초 가기로 했던 장혜숙, 최현호 공동회장 내외 등 몇분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행을 포기함으로 인하여 겨우 그룹 최소인원인 15명을 채우는데 그치고 말았다. 우리의 호프이자 가장 연장자인 양인평 명예회장님과 차정림권사님, 모처럼 손자들을 벗어나 여유를 즐기게 된 임영수 변호사님과 이은수 권사님, 정몽주 30대 종손으로 한번도 추석 등 명절에 성묘를 빠진 적이 없음에도 문중에서 파문당할 것을 각오하고 참석하신 정대준 총무님과 김양자권사님, 칠순을 기념하여 해외여행을 하라는 자녀들의 권유를 뿌리치다가 성지순례를 함께 가자는 나의 권유를 받고 선뜻 함께 나선 안신호 장로님과 정금숙 권사님, 남편이 이집트 사태 때문에 같이 오기를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분 권사님을 모시고 온 정순출 권사님과 초면임에도 잘 어울려준 이유경, 지선애 권사님, 의식있는 기독화가로서 늘 우리 홀리클럽에 신선한 바람을 부어주시면서 참석하신 구여혜 권사님과 구권사님이 초청하신 화가이시면서 목사님이신 김창희 목사님, 그리고 나와 사랑하는 아내 홍연식 권사 등 어느 한분 귀하지 않은 분,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참석하신 분이 없었다. 그렇기에 좀 더 많은 회원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였지만 홀리클럽 이름으로 단체 성지순례를 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생각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은 준비하는 것 만큼 얻는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행준비를 많이 하지 못하였다, 다만 어느 정도 성경을 알고 있다는 똥배짱(?)으로 여행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2. 우리의 이번 여행을 진행한 서울항공사에서 미리 배포한 여행일정표와 사전에 전화

 연락을 하여 온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리 일행은 2013년 9월 17일 21사 30분 인천

국제공항 J커운터에서 모였다. 저녁 늦게 공항에 가게되어 있으므로 나는 사무실에서 오후 5시가 다되도록 일을 하였다. 추석연휴가 끼어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10여일을 사무실을 비우게 되므로 정리할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을 준비하는 아내 홍권사도 그동안 매우 바뺬고, 여행을 많이 다녀 짐싸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미리 짐을 싸지 않았기에 아무래도 불안하여 17시경에 집에 들르니 예상대로 짐을 다 싸지 못하였다. 불야 불야 짐싸는 일을 돕고, 간단히 저녁을 먹은 후 콜택시를 불렀으나 차가 없다고 하여 부득이 노변에서 기다리다가 지나가는 택시를 타고 20시 30분이 조금 지나 도심공항터미널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택시에서 짐을 내리니 인천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가 20시 이후에는 없다고 누군가가 알려 주었다. 내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을 때는 21시 30분까지 버스가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버스가 없다니 난감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이 다름아닌 택시기사였는데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공항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고, 그의 말에 의하면 2일에 1명 정도는 나와 같은 사림이 있다는 것이다. 시간도 늦고 어쩔 수 없이 그 기사의 택시에 승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예정시간인 9시 30분을 얼마 넘기지 않고 인천공항 J카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시간을 지켜 나와 있었다. 서울항공사에서 지정한 우리의 수행가이드는 가이드생활 20년 이상을 하고 이집트에서만도 10년을 살았다는 성지순례 전문가이드인 김화연이라는 여자 가이드였다. 순조롭게 탑승수속을 마치고 SK텔레콤에 들러 데이터 사용료 1일 9,000원으로 제한하는 프로그램에 가입하였다. 우리가 탑승한 비행기는 18일 01시 15분에 출발하는 EY873 비행기였다. 처음에는 대한항공 등 우리나라 비행기가 아니어서 이집트 비행기가 아닌가 생각되어 걱정하엿는데 이집트 비행기는 아니고 아랍에미레이트 비행기로서 제법 괜찮은 비행기였다. 1시간전인 12시 15분부터 탑승을 시작하였는데 나는 비행기에 타 저녁을 먹자마자 영화를 보는 등 일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지에 아침에 도착하는데 도착하자마자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별도로 잠을 잘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3 / 9월 18일 수요일

 06시 15분 아랍에미레이트 수도 아부다비에 도착하여 10시 05분 발 카이로 비행기 EY653으로 갈아 탔다. 시간은 한국보다 5시간이 늦으므로 서울에서 아부다비까지의 비행시간은 10시간이 된다. 비행기 환승을 위한 체류시간이 상당히 있어 공항내 면세점을 돌아다녔으나 별 살 물건은 없었다. 다만 화장품가게 들러 샘플 화장품으로 공짜 화장을 해보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특히 정대준 장로님의 사모님 김양자 권사님은 점원들이 모델로 화장을 하여주어 새각씨가 되었다. 아부다비 공항은 상당히 큰 공항이기는 하였으나 통행로가 매우 협소하여 불편하였고, 개찰구를 수시로 바꾸는 등 질서가 없었다. 카이로에 도착한 것은 11시 55분이었으나 현지시간은 한국시간보다 7시간이 늦으므로 우리가 탑승한 시간은 3시간50분이었다. 카이로 행 비행기는 평소보다 큰 비행기였고, 음식도 꽤 괜찮은 수준이었다. 이집트에서 아람에미레이트로 일하러 오는 일꾼들이 많아 비행기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장에 도착하니 현지 가이드를 비롯한 짐을 날라도 주는 일꾼도 나타났다. 현지가이드는 이집트에서 10년 정도 살면서 500번 정도 시내산을 올랐다는 김종식이라는 분으로 다양한 경험과 나름대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계신분으로 보였다. 그의 신앙적인 입장에서의 가이드는 통속적인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이다. 이집트는 북동쪽으로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 서쪽으로 리비아, 남쪽으로는 수단과 국경을 접하고, 북쪽과 동쪽으로 지중해와 홍해(紅海)가 있다. 국토의 일부인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과 접경하여 중동지방에 걸쳐 있다. 국토는 나일강변, 나일삼각주, 사막, 시나이 반도 4개 지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97%는 사막으로 되어 있고 인구의 대부분은 나일강변과 나일 삼각주에 살고 있다. 4대문명의 발상지로, BC3000년 통일왕국으로부터 BC32년 알렉산더대왕의 이집트 정복시대까지를 왕조시대(고왕국, 중왕국, 신왕국시대로 나눔)를 이루어 신왕국시대에는 투트모두 3세에 의해 아시아까지 통일왕국을 이루었으나 그후 국력이 쇠퇴하여 BC7세기에 앗시리아에게 정복된 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사후에는 프톨레미우스 왕조가 열렸다가 BC 3세기 로마령이 되었고, 7세기 이후에는 아랍인의 침입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16세기 초기에는 터어키령이 되었다가 18세기 말부터 유럽 열강들의 침입으로 19세기 말에는 영국령이 되었으며 1951년 공화국이 되었다. 통용어는 아랍어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는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면적1,001,450㎢이고, 2012년 기준 인구는 약 8530만명이며 GDP 2524억$이다. 종교는 이슬람교 90%, 콥틱교 10%이다. 기후는 전반적으로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와 사막 기후를 가지고 있다. 4월부터10월까지는 여름에, 11월부터 3월은 겨울에 해당하는데 겨울이 우기이지만 강우량이 매우 적어 1년 평균 30mm 내외에 지나지 않지만 아프리카 납쪽에서부터 흘러오는 나일강의 풍부한 수자원으로 인하여 채소, 과일과 어류가 매우 풍족하고 저렴하단다.

카이로는 나일강(江) 삼각주의 남단에서 약 25km 남쪽 나일강 우안에 있다. 시가는 하중도(河中島)인 게지라섬에서 강의 좌안까지 펼쳐지며 아랍권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1월 평균기온 12.7℃, 8월 평균기온 27.7℃, 연평균강수량 25mm이다. 카이로라는 이름은 969년부터 불렸으나 도시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현재의 카이로 남쪽 교외, 나일강 좌안에 해당하며, 로마·비잔틴 시대에 형성되었다. 바빌론이라고 하던 도시는 지금의 구(舊)카이로(Old Cairo:Misr al Atika)에 있었다. 10세기에 마그레브를 본거지로 하는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였을 때 장군 조하르 알루미가 카타이의 북쪽에 새 수도 카히라(Kahira)를 건설하였는데(969), 카히라는 ‘승리’라는 뜻으로 카이로의 어원이 되었다. 이곳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경제적으로도 다수의 인구를 부양하는데 적당하였기 때문에 고대부터 도시가 건설된 것이지만 같은 이유로 카히라라는 지명이 되고 나서도 지배자의 변동은 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 묵은 카이로의 인상은 좋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거리의 교통질서가 엉망인 것이 바로 눈에 띄었다. 신호등이 없고 먼저 머리를 내미는 차가 우선이었으며 심지어 역주행하는 차들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거리는 쓰레기로 가득차 있었으나 치울줄을 모른단다. 다행히도 건조한 기후 덕분으로 위생상태가 최악은 아니고 전염병이 많치는 않다고 한다. 또한 도시의 곳곳에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으나 뼈대만 우뚝서 있고 입주가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이 많아 밤에는 유령이 나타날 것 같다. 이곳은 아파트나 건물의 시행사가 뼈대만 건축하고 내부는 분양받은 사람이 직접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인테리어를 한다. 가이드는 이집트에 정이 많이 들긴 하지만 소망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근면하지 않고 도전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사야서 19장에 기록된대로 수상숭배에 찌들어 있는 이집트가 여호와를 경배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관광시간이 부족하고 비행기에서 어느 정도 먹었으리라고 예상하여 점심은 현지인들이 즐겨먹는 빵과 가지를 다져만든 음식 등을 도시락으로 제공받았다. 맛있다고 많이 먹으라는 가이드의 권유가 있었지만 그 음식을 모두 먹는 일행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카이로에서 구 카이로 쪽으로 가는 곳곳에는 어질러진 흙더미 또는 바위무더기를 볼 수 있은데 이것이 무덤이다. 카이로에만 100만기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다른 서양 사람들과 같이 죽음이 삶과 가까이 있다고 하여 무덤을 시내 가까운 곳에 두는데 특징은 굴로 파서 가족들을 순차로 매장하므로 정리가 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집트인의 장례문화는 2번 장사지내는데 처음에는 송장채 묻어 두었다가 3일후에 다시 매장한다고 한다.

이러한 무덤들을 거쳐 우리가 맨 먼저 도착한 곳은 아기예수가 헤롯의 죽임을 피해 피난했던(마 2:13-15) 예수 피난교회(The Church of Abu Serga)이다. 아기 예수와 요셉, 마리아가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을 때 숨었던 지하 동굴 위에 세워졌으며, 기독교 집성촌인 구카이로에 있다. 4세기 순교자 사르기우스와 바쿠스를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로서 900년전 복원되었으며 바실리카양식으로 지어져 외관은 비교적 평범한 편이며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콥트교회이다. 내부에는 아기 예수 등 많은 성화가 있으며, 열두제자를 상징하는 흰 대리석기둥들이 두 줄로 서있다. 그 기둥 중에 유독 한 기둥만 성화가 그려지지 않고 적색화강암 기둥으로 되어있는데 바로 유다를 상징하는 기둥이라고 한다. 아기예수 피난교회가 있는 올드 카이로는 이집트 기독교의 오랜 흔적들이 남아 있다. 마가가 68년 순교한 곳으로 51%가 기독교화 되었으나 641년 아랍사람이 점령하면서 기독교가 쇠태하여 졌다고 한다.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집트 고대 초대 교회들이 있으며, 당시 카이로 구시가지는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밀집해서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올드카이로(Old Cairo)는 ‘바벨론’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기원은 BC 13세기 초 람세스 2세(Ramses Ⅱ)에게 붙잡혀 왔던 페르시아인들이 람세스 2세에 대항하여 멤피스(Memphis) 방향의 하빈 시타델을 점령하고 항전하자 람세스 2세가 이들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하여 그들이 올드카이로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고국 수도를 그리워하며 ‘바벨론’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다음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찾아간 곳은 예수 피난교회로부터 멀지 않은 모세기념교회이다. 이곳은 모세가 아기일 때 물에서 건져진 곳이기도 하며,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기 전 마지막 기도를 올렸던 곳으로 모세가 백성들과 함께 이집트에서 출발할 때 표식을 남겨 뒀다고 전해진다. 교회는 원래 콥트교회였으나 유대인 랍비였던 벤 에즈라가 모세가 기도를 올린 땅에 예배당을 지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해 이곳에 유대교 회당인 ‘벤 에즈라 유대인 회당(Ben Ezra Synagogue)’를 지었다.이 교회 안에는 ‘구에니체(Guenizeh)’ 또는 안전한 보관소라고 불리는 특별한 장소가 있었는데, 기원전 475년 사슴 가죽에 쓴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을 보관했던 장소라고 알려져 있다. 회당 뒤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메크바’라고 불리는 샘이 회당 밖 지하로 연결돼 흐르고 있다. 그 샘은 나일 강 변에 버려진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물에서 건져낸 곳이라고 전해져 ‘모세의 샘’이라고 부르고 있다.

모세기념교회를 관람한 우리는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 갈색 건물 출입문을 지나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고고학 박물관은 시내에 위치해 있고 그 바로 옆에 이집트 대통령거주지가 있어 늘 데모가 일어났던 곳으로 우리가 갔을 때도 주위에 탱크와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카이로에 들어올 때 고고학 박물관을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우리가 갔을 때는 데모가 없어서 관람에 전혀 지장이 없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도 데모걱정을 하면서 카이로를 거치지 않는 일정도 고려하였지만 데모가 주로 금요일 부터 주일까지 일어나므로 우리가 카이로 관광을 하는 날인 수요일과 목요일은 괜찮을 것이라고 하여 출발하였는데 역시 예상대로 였다. 다만 박물관 옆에 있는 대통령의 저택이 데모대들이 던진 불로 전소되어 검은 흔적만 있는 모습에서 데모가 얼마나 심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고고학 박물관(The Egyptian Museum)은 185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 오거스트 마리에트가 당시의 지배자 사이드 파샤에게 유언함으로써 이루어졌는데 현재의 박물관은 1902년에 개관되었다. 이집트 5천 년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1, 2층으로 구성되어 107개의 전시실이 잇다. 박물관의 1층은 고왕국으로부터 신왕국까지 왕조 연대별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2층은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및 왕의 묘에서 발굴된 매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왕과 왕비의 미이라 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미이라도 많이 있는바, 고대 이집트인들이 동물까지도 신으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에 보면 개구리, 파리, 메뚜기 등의 재앙이 나오는데 이러한 곤충들도 이집트인들은 신으로 생각하였고 심지어는 이,모기, 등도 신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집트에는 730까지의 신이 있다고 하니 그들의 우상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박물관 정면 연못에는 이집트의 상징인 파피루스와 하이집트를 대표하는 연꽃이 심어져 있어서, 이집트 전부를 상징한다.

고고학 박물관을 관람한 우리는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한식 뷔페에 들러서 저녁을 먹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시레기 국, 숭늉(누룽지 물) 등 한국적인 맛이 물씬나는 매우 기분좋은 음식이었다. 그동안 비행기 음식, 이집트 음식 등으로 인하여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여서 더 맛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저녁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만 있어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느냐고 물어보니 이집트 데모로 인하여 최근에 손님이 너무 없다고 하여 마음이 아팠다. 식사를 마치고 카이로 서북쪽에 위치하는 오늘 밤 숙박할 GRAND PYRAMID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위치하는 아파트들은 몇군대만 입주하고 많은 아파트들이 입주를 하지 않아 매우 을씨년 스럽다. 낮에 본 것 보다 해가 어두워질 무렵 뼈대만 있고 불빛도 없는 아파트를 보니 분위기가 매우 썰렁하고 곳에 따라서는 패가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울 것 같았다. 호텔에 들어가면서 과일이 싸다고 하여서 홍권사가 딸기를 사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맛이 없어 거의 먹지를 못했다. 제철이 지났기 때문이란다. 우리가 묵은 호텔은 제법 규모가 크고 외모는 그럴듯하였지만 화장실의 사워기의 물이 잘나오지 않고, 특히 따뜻한 물과 찬물이 잘 분리되어 나오지 않아 매우 불편했으며, 세면대의 물도 잘 내려가지 않아 우리나라 60, 70년대의 화장실을 보는듯했다.

 

 4 / 9월 19일 목요일

  오늘은 홍해를 건너 시나이반도를 거쳐 시내산까지 가야하는 일정이기 때문에 아침부터 서둘러야 했다. 4시 30분 기상, 5시 30분 식사, 6시 30분 출발의 일정이었다. 맨먼저 들른 곳은 회향, 올리브 유, 장미 유 등을 판매하는 가게였다. 국제관광협약상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관광객들이 선물가게를 필수적으로 들러야 한다고 가이드는 강조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7시부터 8시까지 머물렀는데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곳의 제품들은 만병통치약이므로 사지 않을 수 없다. 아내는 그곳에서 제사장만이 즐겨 먹었다는 박하와 근채와 회향 중 회향을 150불을 지불하고 샀으며, 그 밖에 며느리와 사돈에게 준다고 장미유도 2개를 샀다. 곧이어 일행은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여러개 있는 기자 유적지에 도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막 한가운데에 서있는 쿠푸 왕, 카프레 왕,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이다. 맨먼저 도착한 곳은 세 피라미드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북쪽에 세워진 쿠푸 왕의 피라미드로, ‘대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4,600년전 구석기시대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 2대 파라오인 쿠푸 왕은 자신의 무덤으로 86km떨어진 아스완에서 13톤의 돌 260만개를 가져다가 23년에 걸쳐 이 피라미드를 세웠다고 한다. 바닥은 한 변의 길이가 230.34m인 정사각형인데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고, 높이는 146.59m다. 뜨꺼운 뙤약볕에서 바라보는 피라미드의 위용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구석기시대 그 무거운 돌을 그 먼 거리에서 어떻게 운반하여 이러한 큰 무덤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죽음이후의 무덤을 위하여 그 많은 노력을 하였다니 인간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노예나 평민들의 고통이 있었을지 참으로 인간의 욕심과 죄악이 보인다.

쿠프왕의 피라미드 옆에서 사진을 몇장 찍은 우리는 서쪽으로 더 내려가 위 3개의 피라미드와 그 앞에 있는 스핑크스가 한꺼번에 바라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쿠푸 왕의 피라미드 서쪽에는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가 있으며, 3개의 피라미드 중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는 원래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더 높은 156m로 더 웅장하게 지을 계획이었지만 143m를 올리는 데 그치고, 바닥의 한 변도 216m로 쿠푸 왕의 피라미드보다 조금 작다. 카프레 왕 피라미드의 서남쪽에는 쿠푸 왕의 손자인 멘카우레 왕의 피라미드가 있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가 67m에 바닥의 한 변이 105m로 쿠푸 왕과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보다 규모가 훨씬 작다.

스핑크스는 고대 이집트의 전설적인 동물로, 종종 태양의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던 파라오를 상징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 동물은 인간이나 양, 또는 매의 머리를 한 사자가 움츠리고 앉아 있는 형상으로 조각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스핑크스가 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머리가 사람의 모습으로 조각된 것은 인간의 지혜를 상징한다고 말해지고 있다.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신전이나 왕궁·분묘 등에서 그 훌륭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위 카프레왕(王)의 피라미드 앞에 있는 스핑크스가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것인데, 군데군데 보수(補修)한 흔적이 있다. 전체의 길이 약 70 m, 높이 약 20 m, 얼굴 너비 약 4 m나 되는 거상(巨像)으로, 그 얼굴은 상당히 파손되어 있으나 카프레왕의 생전의 얼굴이라고 한다. 앞으로 뻗은 앞다리 사이에는 투트모세 4세의 석비(石碑)가 있다. 이 스핑크스는 ‘지평선상의 매’를 나타내는, 태양신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 밖에 기자 유적지에는 왕족과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신관의 묘와 수백 개의 무덤 유적이 흩어져 있다.

이번 여행일정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 기자지구 외에도 이집트에는 86개의 피라미드가 있는데 멤피스 근처 사카라 사막에는 약 15개의 왕족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다. 가장 중요한 피라미드는 제3 왕조 2대 왕이었던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를 꼽을 수 있다. 이집트에 세워진 피라미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많은 피라미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조세르 왕의 피라미드는 모두 6층으로 이루어진 조금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약 62m 높이에 커다란 계단 모양을 띠고 있어 일반적으로 계단식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가장 아랫부분인 1층에 이전 왕들의 무덤처럼 마스타바가 있고, 그곳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며, 그 위에 각기 크기가 다른 5층의 마스타바를 올려놓아 계단을 이룬 모습이다.

이집트 왕들은 사망후 40일간 미라를 만들고 그 후 30일간 제단앞에서 마지막 제사를 지낸후 피라미드에 안장된다고 한다.

기자지구를 지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았던 고센지방을 멀리 바라보기만 하면서 홍해쪽으로 향했다. 고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에 의하여 지어진 창고의 성읍 국고성(출1:11) 비돔과 출애굽을 시작한 라암셋 (출12:37)이 있다.

라암셋에서 출발하여 최초로 진을 친 곳 숙곳(출12;37, 민33;5,6, 비돔에서 서쪽으로 15㎞에 위치한 곳)을 거쳐 홍해를 향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원전 1446년 4월 15일 출애굽하였다고 한다. 일행은 홍해를 향하여 달려가는 중간에 이은수 권사님의 인도아래 찬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의 버스는 홍해중에서 가장 폭이 좁은 일본 사람들에 의하여 축조되었다는 해저터널을 통해 시나이반도의 수르광야에 이르렀다. 그곳에 걸어서 사흘길 약 30km쯤 떨어진 곳에 쓴물을 단물로 만들었다는 (출15:23, 민33:8) 오늘날 아윤부사라고 불리는 마라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모세의 우물로 불려지는 베두인들의 우물이 있으며 모래 벌판에 수십 그루의 대추야자 나무들(종려나무)이 자라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여행사가 준비한 한식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허허벌판 광야를 달리는 우리 일행에게 음식을 제공할 식당을 만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조금 지나면 엘림이 있는데 그곳은 마라와 달리 샘물 열둘과 종려 나무 칠십 주가 있어 진을 친 곳이지만(출15:27, 민33:9) 우리는 그곳을 거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면서 42번의 진을 쳤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나무 이름은 생소한데 종려나무는 대추야자나무이고, 박넝쿨은 아주까리, 뽕나무는 돌무화과, 감남나무는 올리브나무를 뜻한다.

마라에서 경찰의 검문검색이 있었는데 어떤 일인지 우라의 차를 보내주지 않는다. 당초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경찰의 안내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붙잡고 보내주지 않는다. 경찰의 안내를 받기 위해서는 12시까지 도착하여야 한다고 하여 열심히 달려왔지만 역부족인지라 12시 30분쯤 도착하였는데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하였는데도 단지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통과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버스에는 이집트인 현지 가이드뿐만 아니라 현지 경찰까지 탔는데도 이집트 국토임에도 베두인 자치지구 경찰의 파워를 이겨내지 못한다. 30분 쯤 지났을까 가라고 해서 30분쯤 갔는데 또다시 베두인 경찰은 1시간 정도 붙잡아 놓고 아무 설명도 없이 보내주지 않는다. 참으로 후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후 우리는 아주 누추한 휴게소에 들러 양장로님께서 사준 콜라로 목을 축인후 허허벌판 광야를 달렸다.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돌아가라고 한단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광야는 회복의 땅이란다. 광야는 말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곳이란다. 아브라함, 요셉, 다윗, 엘리야, 예레미아, 예수, 베드로, 마가 모두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재충전을 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으니 광야말로 속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회복하는 장소라고 한다. 사실 광야, 그것도 뜨거운 광야는 우리 인간들이 살기에는 편안한 곳이 아니다. 우리 같으면 며칠도 살기 힘든 곳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적으로 환경이 좋고, 풍족하고, 편안하였다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시내산에 이른 경로의 지명에 대하여 가이드의 자세한 설명이 없었으나 성경에 나타난 경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라암셋- 숙곳- 바알스본- 믹돌- 홍해- 수르광야- 에담광야- 마라- 엘람- 돕가- 알루스- 르비딤- 시내산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시내산 밑에 있는 ST.CATHERINE VILLAGE WADE EL RAHA 호텔에 도착한 것은 9시경이었고, 뷔페로 저젹식사를 빨리하고 잘 나오지 않은 물로 샤워를 한 후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1시 30분에 기상하여 시내산을 등정해야 한다.

 

5 / 9월 20일 금요일

 1시 30분 기상후 50분에 출발하여 10분정도 걸어가 2시경 성 캐더린 수도원 앞에서 집결헸다. 4세기 초 이집트의 막시미누스 황제 당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였는데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캐더린은 용모와 학식이 출중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서 세례를 받고 황제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 결국 캐더린은 고문을 받고 순교를 하게 되었고, 그녀의 시신은 천사에 의해 시나이 반도 제일 높은 곳으로 옮겨진다. 이 사건 이후 시내산 수도원이 성 캐더린 수도원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수도원 앞에서 낙타를 탈분은 낙타를 타고 걸어서 갈 분은 걸어서 시내산 등정을 시작했다. 낙타는 낙타내로 불편한 점이 있고, 걸어서 가는 분은 걸어가는대로 힘이 든다. 우리가 등산을 시작한 곳은 1,553m지점이고, 정상은 2,285m이므로 732m를 걸어가야 한다. 다행히 보름이라 달빛이 밝아 손전등만 하나 있으면 걸어가는데 어두워서 지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낙타가 타고 갈 수 있는 지점은 정상 밑에 있는 가게까지이고 그곳으로부터는 780개의 계단이 있어 걸어서 가야 한다. 4시경 도착한 우리는 정상 밑 가게에서 잠간 쉬었는데 낙타를 타고 오던 차정림 권사님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 뒤에 걸어서 오고 계셨는데 낙타가 너무 무서워서 타지 않고 걸어서 오셨단다. 또 일행중에 정금숙 권사님은 처음에 걸어가시다고 너무 힘들어 중간에 낙타를 탔는데 그렇게 지친 사람들을 겨냥하여 낙타부대가 등산객의 뒤를 쫒고 있었다. 중간에 타도 비용은 동일하였다. 불합리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낙타도 동일한 거리를 걸어왔고, 혼자갈 수 없는 분을 싣고간다는 의미에서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정상 밑 가게에서 화장실도 다녀오고 하면서 잠간 쉬다가 마지막 780계단을 올라간다. 처음에는 홍권사, 정금숙 권사님도 출발하였으나 50m쯤 가다가 포기하고, 낙타를 타지 않고 처음부터 걸어 왔던 구여혜 권사님도 절반쯤 가다가 도저히 못가겠다고 가이드와 함께 되돌아갔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등산한 일행은 안신호 장로, 정대준 장로, 임영수 변호사, 이은수 권사, 그리고 나 5명뿐이었다. 다른 교회 순례팀 중에는 노인, 환자들도 있었는네 우리 일행은 그렇지 못했는데 가이드가 자기 기준에 따라 너무 빨리 등산을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정상에 오르니 5시경, 조금 있으니 일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안개가 많아 일출 광경이 아주 황홀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정상에서 상주에서 온 교회의 교인들과 함께 간단한 예배를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이슬람교도들의 기도처란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교회도 있었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개방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의 발에 쥐가 났다. 처음에는 왼발 종다리에 쥐가 나더니 그 쥐를 풀고 나서 한 참 있으니 오른쪽 다리의 종다리에도 쥐가 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이 어렵다고 한 정상 등정이 쉽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나의 교만을 꺾기 위해 쥐가 났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은수 권사님은 매일 수영을 하고, 정대준 장로님은 매일 조기 축구를 하며, 안신호 장로님, 임영수 변호사님은 평소 많이 걸었다는 점에서 내가 그 대열에 낀 것만도 감사하다.

하산을 마치니 7시 30분 경 아침식사를 하고 짐을 챙겨 버스에 타니 9시 30분이다. 나의 방은 317호실이었는데 버스가 바로 앞에 있어 짐을 캐리할 필요가 없어 직접 하겠다는데도 호텔의 직원이 막무가내로 들어주겠단다. 한푼이라도 벌려는 그들의 생존을 향한 집념을 보고 아내는 불쌍하니 맡기라고 하였고, 나도 동감이어서 맡겼다. 우리는 9시 45분경 바로 호텔 아래에 있는 아론이 계명을 받으로 올라갔던 모세가 빨리 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Gold Calf교회를 바라보면서 하산을 시작했다. 우리는 홍해쪽으로 달려가서 누에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한식으로 점심을 하였다. 식당주인은 가이드와 잘아는 사이로 같이 수쿠버다이빙을 한단다. 그래서 가이드 김종식씨는 원래는 이스라엘 국경까지 가이드를 해야 하는데 항공사 안내가 중동 사정을 잘 알고 있어 현지 가이드 없이도 잘 할 수 있어 여기에서 가이드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홍해 해안을 타고 7일 전쟁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협상을 하였던 캠프데이비드를 보면서 북상, 2시경 에일럿에 도착하여 이집트 출국, 이스라엘 입국철자를 밟았다. 이스라엘 입국절차는 아랍국가로 둘러싸여 항상 전쟁과 테러의 위험이 있는 나라답게 매우 복잡하였다. 에일럿은 홍해를 끼고 있을뿐만 아니라 1년 360일 동안 해가 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의 가이드는 우명일 목사라는 분이다. 히브리대학에서 박사코스를 밟는 분인데 매우 차분하고 전통적인 선비스타일이었다.

성경상 시내산이후 출애굽 경로을 보면 디베라, 하세롯, 기브롯핫다아와, 에일럿, 에시온 게벨(아카바), 가네스바네아에 이른 후(민33:37) 모세가 가데스바네아를 떠나 에돔땅 부놈을 통과하여 동편광야로 갈수 있게 해달라고 했으나 에돔왕이 이를 거절하여 (민20:22,23) 에돔땅(신 2장) 옆으로 북쪽에는 이스라엘 산맥과 남쪽에는 요르단 산맥사이의 광야와 와디아라바를 지나 호르몬산에 이른다. 여기서 모세의 형 아론이 죽어 장사지낸다(참고 출13장, 19장, 민10장, 신1장).

우리는 에일럿을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버스를 타고 아라바계곡길인 90번 도로를 타고 북상하였다. 이곳도 역시 광야가 계속되었는데 같은 광야라도 이집트와는 달리 매우 정돈된 모습이었다. 이스라엘도 국토의 3분의 1이 광야이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부는 거의 광야이지만 곳곳에 초지를 조성한다든지 종려나무 등을 재배하였다. 이스라엘의 농업과 축산업은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으며 농장의 관리형태가 공동생산, 공동판매 형태와 개인생산, 공동판매 형태가 있다. 우리는 에서의 거주지 였던 에돔을 거쳐 사해를 바라보며 계속 북상하면서 해가 거의 질무렵 사해 서쪽에 있는 소금산에 소금기둥이 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의 아내를 연상하는 돌 동상을 보았다. 그러나 롯의 아내 그 자체로 보기에는 너무 돌이 컸다 모세가 출애굽한 길은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아니다. 모세는 에돔왕이 통과를 거절하여 요르단 쪽 길을 따라 가나안을 향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르단의 모세의 길을 따라 이스라엘에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우리 여행일정은 요르단은 이스라엘 관광을 마친 후 하게 되어 있다.

사해 북쪽 끝지점에서 서쪽으로 1번 도로와 437번 도로를 따라 가면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고 묶는 여관과 유다의 동생 베냐민 거주지, 베두인족의 거주지, 이스라엘 정착촌 등을 거쳐 우리가 숙박할 라말의 MOVENPICK 호텔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팔레스타인 지역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근거없이 큰 정착존을 이루고 있고, 이스라엘의 주권이 미친다는 점이다.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에 있었던 정착촌에서는 철수하였으나 요르단 서안 예루살렘 근처의 정착촌은 오히려 확대되고 있어 약 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정착촌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몰아내고 그 구역에 정착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엣는 늘 분쟁이 계속되어 왔으며 총리의 성향에 따라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지금은 팔레스타인이 정착촌을 인정하고 대신 이스라엘로부터 가스 등을 공급받는다고 한다. 가장 큰 정착촌은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마할레아두밈이다. 라말라는 팔레스타인의 수도이나 이스라엘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낙후된 지역이다. 프랑스인이 지었다는 호텔은 접근로가 좁기는 하나 비교적 깨끗하였다. 이스사엘의 정결예식이 지쳐지지 않아 한국음식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어 이곳의 호텔을 정하였다고 하나 비용이 싸서 예루살렘의 호텔이 아닌 이곳의 호텔을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우리는 이곳에서 3일을 묵게 되므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랬동안 묶는 곳이다.

 

6 / 9월 21 토요일

 오늘부터 이스라엘의 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9시에 호텔을 출발, 열심당원 영웅들의 성지 맛사도로 향했다. 이스라엘의 기후는 11월부터 3월은 우기, 6월부터 9월은 건기이며 나머지는 과도기적 계절이다. 유다광야는 우기에 비가 오면 강을 이루는데 이를 와디라고 한다. 또한 광야는 우기에는 아름다운 꽃이 여기저기 핀다고 한다. 여행하기에는 이번 여행과 같이 건기에 오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려면 우기에 오는 것도 좋다고 한다. 그런데 예루살멤 근처 광야에서 문명의 이기를 거절하면서 전기도 들어조지 않는 오두막집을 짓고 양을 키우면서 사는 베두인족을 보게되는데 21세기 문명의 시대, 이스라엘이라는 문명의 나라에서 이러한 종족이 있다니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맛사다(Masada)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 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높이 434 m, 정상이 길이 620m, 너비 250m 내지 120 m인 고구마 모양의 천혜의 요새이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135년에 하스모니안 왕조가 에돔에 대항하기 위하여 세워졌는데 헤롯왕에 의하여 기원전 37년에 현재의 모양으로 건설한 요새 궁전이다.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켜 로마 총사령관 티투스와 실바 장군에 의한 10군단 15,000명의 공격을 받았지만 천연적인 요새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으나 주위에 인공적인 토담을 쌓아 공격함으로써 결국 73년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점령 직전날 밤에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967명의 열혈 당원들을 모아 놓고 '내일 아침 로마 군에 잡혀서 온갖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오늘 밤에 우리가 스스로 자유스럽게 영광의 죽음을 선택 합시다.'라고 연설하여 이 말에 감동한 각 가족의 가장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칼로 찔러 죽인 다음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 명을 추첨하여 그 열 명이 나머지 남자들을 죽였고 남은 열 명이 한명을 추첨하여 아홉 명을 죽인 후 그도 최후로 자결하였다. 이 비극의 전설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맛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이스라엘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맛사다에서 북쪽으로 15㎞ 쿰란 남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엔게디가 있다. 엔게디는 아랍어로 ‘새끼 염소의 샘’이라는 뜻이 있다. 이곳은 헤브론에서 거의 정동 쪽에 있는 샘과 이에 딸린 내(개울)의 이름으로, 사해 서쪽에 있는 석회석 벼랑 아래서 약 30톤의 물이 솟아나와 이루어진 곳이다. 유대 광야 중에 가장 이상적인 오아시스이고, 이 부근은 자연 보호 지역으로 들짐승들이 뛰어노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굴이 많다. 아가서 1장 14절에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옛날 포도원과 화초가 만발하던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에스겔서 47장 10절에는 에스겔에게 많은 물이 나오는 환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는 사울과 다윗왕의 이야기이다.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자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엔게디로 도피하여 그곳 황무지의 굴속에 숨었다. 그 때 사울이 삼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하였으며 추적 중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르러 굴이 있어 사울 왕이 그 굴에 쉬러 들어갔다. 이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차마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사울인지라 보복하지 않고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었다(삼상24:4).

마사다와 엔게디 관광을 마치니 11시였다. 40분을 달려서 사해의 칼리아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사해(Dead Sea)는 갈릴리 호수에서 흘러나온 요단강이 광야를 적시고 도착하는 곳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해저 350-4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길이 78km, 최대 폭 17km, 넓이 9백 65㎢로 갈릴리 호수의 6배이다. 소금바다로 보통 바다의 염분 융해율보다 약 5배-6배 높은 30-33%의 염도를 함유하여 어떠한 생물도 생존하지 않는다. 사해에 몸을 담그면 저절로 몸이 둥둥 뜨며, 각종 유기물이 함유되어 있어 피부병 및 류마티스 등에 효험이 있고 특히 사해의 검은 진흙은 피부미용에 매우 좋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국경에 위치한 사해는 엄밀히 말하면 바다가 아니라 호수이다. 세계에서 수면이 가장 낮은 요르단 강으로부터 유황과 질산 성분을 함유한 수백만 톤의 물이 날마다 이곳으로 들어오지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는 못하고, 오히려 유입되는 양에 비해 더 많은 양이 증발함으로써 수면은 점차 낮아졌고, 수분이 증발될 뿐 수분 가운데 함유되어 있던 염분 등은 고스란히 이곳에 남게 된다.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된 이런 상황으로 인해 사해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퇴적층의 두께는 점차 두꺼워졌다. 1924년에는 사해 동남쪽에서 BC 2,500년-2,000년 전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BC 2,000년 전까지는 주거지였으나 갑자기 폐허가 된 곳으로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1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사해에 몸을 담고 해수욕을 하고 진흙으로 온 몸에 맛사지를 하였다. 물이 짜 피부에 조그만 상처가 있어도 아팠고, 파도타기를 하다가 물이 눈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따가워 견딜수가 없었으나 몸에 좋다고 하니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해수욕을 하였다. 장난꾸러기 정대준 장로님은 남자들의 사타쿠니와 여성들의 가슴에 까지 진흙을 넣어주어 맛사자를 하도록 하여 일행들을 웃겼다. 이은수 권사님은 이러한 장면들을 동영상으로 남겼다는데 다시 한번 보고 싶다. 점심시간이 늦었다는 가이드의 재촉에 따라 열악한 샤워시설에서 간단히 샤워를 하고 사해 북쪽 서단에서 해변을 끼고 남쪽으로 5㎞쯤에 있는 쿰란이라는 고대 거주지 근처의 식당에서 현지식으로 식사를 하였다. 그곳 식당이 있는 건물에는 사해특산물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주로 사해소금 및 진흙으로 만든 건강을 위한 제품들이었다. 가이드는 제품의 우수성을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사는 사람은 적었다. 카이로에서 많이 샀기 때문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이곳의 진흙으로 만든 팩 등은 매우 좋은 제품으로 꼭 사올 필요가 있었다는데 사전지식이 부족하여 사지 않았다.

점심식사후 그야말로 쨍쨍 내리쬐는 태양의 강렬한 빛으로 그야마로 눈을 뜰 수 없는 상태에서 쿰란을 관광하였다. 일행중 정순출 권사님 등 일부는 강한 해빛을 피해 일부 관광을 생략하였다. 일부는 수건이나 스카프로 히잡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훨씬 시원하다는 것이다. 이곳 중동지방 여인들이 머리에 히잡을 쓰고 온몸에 옷을 입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 한다. 물론 이슬람의 의복문화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기후탓도 있다는 것이다. 히잡의 종류는 얼굴이 드러나게 머리카락만 가리는 것이 히잡이고,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것이 차도르, 눈을 제외한 전신을 가리는 니캅, 눈까지 가리는 부르카 등이 있다.

쿰란 거주지에서 서쪽으로 3백여m 떨어진 유대광야의 높은 언덕이 막 시작되는 입구에 동굴 11개가 있다. 이곳에서 금세기 인류역사에서 놀랄만한 사해 사본이 발견되었다.1947년 어느 날 베드윈 족의 양치기 소년은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동굴의 항아리 안에서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고대 히브리어로 빼곡히 적혀 있는 이 두루마리는 성경 이사야서 등 에스더서를 제외한 구약 38권이 적힌 필사본이었다. 1949년 요르단 고고학 연구소의 하딩에 의해 쿰란 제1동굴에서 성서,비성서문서,외경 등이 발견되었고, 52년 제2동굴에서는 작은 단편들이 발견되었다. 다시 제1동굴에서 북쪽으로 1.6㎞ 떨어진 곳에서 제3동굴이 발견되었으며, 274개의 히브리어 및 아랍어 단편과 2개의 동판 두루마리가 나왔다. 또 같은 해 쿰란 서쪽에서 4개의 동굴이 더 발굴되었으며 에스더를 제외한 성서의 모든 문서와 경문서, 주석서, 제의문서 등이 발견됐다.이 두루마리들은 기원전 2세기의 것으로 판명됐으며, 마카비시대에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고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이곳에서 쿰란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율법과 예언서를 필사해 자손들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이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공동체 생활을 했으며,스스로 참 이스라엘인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기다렸다.쿰란공동체는 194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는데 고고학자들은 제1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집터를 발견했으며.복잡한 방들과 책상 의자가 놓여있는 방,양피지,잉크도 발굴되었다.그리고 와디와 연결해 물을 저장했던 물탱크,주방,연구실,기도실,도기가마,하수도 등이 잇따라 발굴됐다.쿰란공동체는 서기 68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됐다.그러나 그들은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두루마리 구약성경과 문헌들을 항아리에 담아 동굴에 숨겨 놓았던 것이다. 사해사본은 매우 건조한 이 지역의 기후 탓으로 2천년 가까운 세월을 넘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으며, 가장 오래된 구약필사본이며 현재 예루살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해사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경의 사본이었는데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것이어서 성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쿰란 순레를 마친 우리는 오후 3시 40분 경 10,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인류 최대의 고대도시 여리고로 향했다. 오후 4시 10경 도착한 곳은 예수님께서 40일간 금식후 마귀에게 시험받으신(마4;5) 시험산을 바라볼 수 있는 도로변이다. 시험산에 직접 올라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조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시험산에는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굴이 있는 곳에 세워진 교회와 산정상에 있는 교회가 있다. 그곳 도로가에서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직원들과 어쏘 변호사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말린 대추야자열매와 무화과 열매를 샀다.

그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엘리사의 샘이다. 일명 술탄샘이라고도 부르는데 선지자 엘리사는 여리고에 머물렀을 때 여리고 사람들이 이곳은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빠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다고 청원하므로 엘리사가 지하수가 나오는 수원지에 소금을 뿌려 고쳤다(왕하 2;19-22). 그후 많은 양의 물이 솟아나와 여리고 평원의 가장 큰 샘이 되었고 농사도 잘되었다.

이어서 조금가자 길가에 성경에서 보았던 삭개오의 뽕나무가 있었다. 사실은 뻥나무가 아니고 돌감람나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뽕나무는 누가복음 19장에 있는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는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700년전에 누군가가 그 뽕나무를 추정하여 심었다고 하는데 우리의 가이드는 2500년이나 된 나무로서 예수님 당시에도 존재하였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 일행은 구여혜 권사님의 안내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가 조금 전에 샀던 대추야자멸매와 무화과 열매를 거의 반값으로 파는 행상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물건을 사지 않자 가이드에게 욕을 하였다. 그 이유는 가이드가 가게 주인과 짜고 우리로 하여금 시험산 근처에서 비싸게 물건을 사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들의 믈건은 곧바로 썪는 질이 나쁜 믈건이라고 하니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다. 삭개오의 뽕나무를 보니 거의 오후 5시가 되어 우리는 다시 우리의 숙소로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다. 여리고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예루살렘에서 15㎞ 지점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가다가 반드시 쉬었다가 가는 곳인 사마리아 여인숙이 있다. 이곳이 강도만난 사람을 재운 사마리아 여인숙이란다.

 

 7/ 9월 22일 일요일

 오늘은 주일이므로 아침 6시에 예배를 보기로 했다. 일행중에 화가이면서 목사님인 김창희 목사님이 예배를 인도하였는데 말씀이 설교식이 아니라 주님앞에 나아가는 신앙고백식이어서 매우 은혜로왔고 성찬식을 하여 더욱 의미 있었다. 구여헤 권사님의 기도 또한 은혜로웠다. 재미있는 것은 아랍인들은 금요일부터 쉬고, 유대인들은 토요일부터 쉬며, 기독교인들은 일요일만 쉰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에는 정동파 유대인이 약 10%정도 있는데 그들은 직업이 없고 군대를 가지 않으며 자녀수당으로 생계를 이어가므로 피임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식사후 8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분리장벽을 거쳐 이스라엘의 군인과 경찰이 2인 1조가 되어 시행하는 검문을 받은 후 예루살렘시내로 입성하였다. 늑대들의 언덕이라고 하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지나갈 때 이곳이 가이드 우명일 목사님의 주소지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긴 하지만 인구가 78만 명에 지나지 않고 산업이니 상업이 발달되지도 않으며 관광수입이 주여서 아주 소득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텔아비브에 4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대사관 등 공공기관이 많으며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여서 도시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나 우리의 관광일정에는 빠져 있어 아쉽다. 버스는 우명일 목사님이 다니는 세계 50위 안에 드는 히브리대학 옆을 지난다. 팔레스타인테러로 말미암아 대학이지만 경계가 삼엄하다고 한다. 우리는 8시 4분 경 감란산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 후 오전일정을 모두 걸어서 관광해야 한다.

우리가 맨먼저 도착한 곳은 감란산(mount of olives)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한 장소라고 전해지던 곳에 세워진 승천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할 때 발자국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승천바위(Rock of Ascension)를 중심으로 세워졌다(눅 24 : 50,51, 행 1:9)). 교회의 천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상징하기 위해 내부에서 하늘이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A.D.383년에 비잔틴 제국의 귀족 출신 포이메니아(Poimenia)의 봉헌으로 최초로 건립되었으며, A.D.614년에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파괴된 뒤 A.D.676년에 재건되었으나 A.D.1009년에 이집트의 파티마조 칼리프 하킴(Hakim Biamr-Allah, 재위 996∼1021)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1152년에 십자군이 팔각형의 외벽을 가진 교회를 재건하고 아오스딩(Augustin) 수도회가 관리했으나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1137~1193)가 이끄는 이슬람군대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1198년에 무슬림들이 8각형의 건물 천정에 둥근 돔(Dome)을 씌우고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했고, 현재는 이슬람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승천교회 근처에 위치하였지만 주일이라 개방하지 않아 내부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서 보기만 하고 지나간 교회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친 것(누가복음 11:2-4)을 기념하여 세운 주기도문교회이다. 감람산의 동굴 바로 위에 세워진 Pater Noster, 즉 라틴어로 "우리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주기도문 교회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이 세상 말기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해서 설파하신 곳이다. 4세기, 예수의 가르침을 기념하기 위해 콘스탄틴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에 의해 처음 교회가 지어졌으나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며, 지금의 교회는 1874년 프랑스에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주기도문 교회의 벽면에는 희랍어, 히브리어는 물론 점자로 적힌 주기도문까지 82개국의 언어로 적혀 있다고 한다.

감람산 정상에서 눈물교회를 향하여 내려가는 길에는 이스라엘의 랍비들의 무덤이 있는데 평소 존경을 많이 받거나 자비를 많이 베푼 랍비의 무덤에는 돌이 많이 놓여져 있다고 한다.

눈물교회는 감람산 정상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내려가는 감람산 중턱에 위치해 있으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 하실 때에 예루살렘성의 최후를 생각 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우신 것(눅19:41,42)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이다. 교회 건물의 지붕 곁에 네 귀둥이에 눈물을 상징하는 형태의 돌이 뾰쪽하게 세워져 있으며, 창문의 창살 무늬는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면류관을 상징하는 형태로 만들어 창문에 부착이 되어 있다. 5세기 무렵 비잔틴 양식의 작은 성당이 있던 자리에 1955년 이탈리아 건축가가 다시 건립하였으며, 교회명인 ‘도미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는 라틴어로 ‘예수가 눈물을 흘리다’는 의미이다. 건물 외관이 눈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예수의 눈물, 슬픔을 상징하는 항아리가 있다

교회 제단에는 성경 구절에 나오는 암탉이 병아리를 모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마당에는 예수가 머리에 쓴 가시관을 만든 가시나무가 있다. 교회 안 뒷부분에는 5세기 무렵의 제단이 남아 있고 정면의 유리창에는 예수의 고난을 상징하는 가시덩굴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곳을 통해 예루살렘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이어서 도착한 곳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동쪽 감람산(橄欖山)의 서쪽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다.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 그리스도가 종종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기도한 곳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도 피땀을 흘리며 최후의 기도를 한 곳이다(마 26:36, 막 14:32, 눅22:44). 겟세마네는 히브리어로 ‘기름짜기’라는 뜻이다. 이곳에는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올리브나무가 많으며, 수령(樹齡) 1,000년이 넘는 올리브나무가 8그루나 되고,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둘레가 7.3 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예수께서 번민하며 최후의 기도를 하였다는 바위 위에 만국교회 또는 겟세마네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의 교회는 1920년 비잔틴과 십자군시대의 교회의 잔해 위에 16개 국가의 성금으로 12개의 돔 모양의 지붕으로 설계 건축하였기 때문에 만국교회라고도 부른다. 현재 이 교회는 카톨릭의 프란시스코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겟세마네 교회 관람을 마치고 기드론 골짜기를 거쳐 예루살렘 성을 향했다. 맨먼저 도착한 곳은 베데스다 연못이었다. 베데스다 연못의 베데스다는 고대 아람어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어원상으로는 '자비의 집'을 의미한다. 이곳은 기원전 8세기에는 ‘윗 저수지’로 불렸었는데다(이사야서 7:3, 열왕기 18:17), 요한복음 5장 2절 이하에 이곳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요5 : 1-9)

이 연못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스데반 문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근처에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성 안나 성당이 있다. 스데반 문은 '양문' 으로도 불리므로 베데스다 연못이 '양의 연못'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연못은 고대에 기드론 계곡에서 흘러온 빗물을 모아 성전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직사각형의 형태로 깊이가 20m 정도 되었고, 면적은 120 x 60m 정도였으며, 연못 주변에는 의학적∙종교적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특히 연못 동쪽에는 BC150년경부터 AD70년경까지 욕실과 병실 등이 지어져 대중들을 위한 치료소로 활용되었다.

오늘날 예루살렘에는 이슬람의 사원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 기독교의 성지로만 보기에는 현실적인 설득력이 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역시 원형그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고 많은 상가로 들어찬 길이었지만 십자기의 길을 추정하여 그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라틴어로 비아돌로로사 (Via Dolorosa) 혹은 비아크루시스(Via crucis)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길’(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은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는 약 800m의 길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의미한다. 이 길에는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의 지점이 있으며, 이 중 제10지점 에서 제14지점까지는 성묘교회 안에 위치하고 있다

 

                                               <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가 시작되는 제1지점은 예수가 재판을 받은 본디오 빌라도 재판정으로, 이 곳에서 심문을 받았고, 예수의 십자가형이 확정되었다. 이곳은 헤롯왕(헤로데스)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해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있다. 예수 당시의 로마 총독부는 가이사랴(카에사리아)에 있었으며, 당시 총독 빌라도는 유월절 기간 동안에 자주 일어났던 반(反) 로마 시위를 진압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선고교회 (Church of Condemnation)가 서 있다.

제2지점은 로마 군사들이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희롱한 곳이다. 이곳으로부터 도시의 거리를 지나 골고다로 향했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조롱하였다. 빌라도는 십자가를 메고 나오는 예수를 보고 “자, 이 사람이오(요한복음 19:5)”라고 했다.

제3지점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이다. 1856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안 기념교회에 속해있는 작은 교회당에 표시되어 있다.

제4지점은 예수가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제5지점은 구레네(키레네) 사람 시몬(Simon of Cyrene)이 예수의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까지 대신 진 곳이다. 성경에 의하면 “구레네 사람 시몬으로 알렉산드로스와 루포스의 아버지 였는데, 시골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마가복음 15:21)”라고 되어있다. 1895년에 세워진 프란시스칸 교회가 있다.

제6지점은 성 베로니카(St. Veronica) 여인이 물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성 베로니카가 예수의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는데 돌려받은 손수건에 예수의 초상이 새겨졌다는 전승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가 1882년에 이 지점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제7지점은 기둥에 표시 되어 있으며, 예수가 두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당시에는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고 한다(히브리서 13:12~13). 1875년에 이곳에 두 개의 예배당이 세워졌다.

제8지점은 예수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8) 라고 말씀하신 곳이다.

제9지점은 예수가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콥틱 교회가 서있다.

제10지점은 예수의 옷을 벗긴 곳이다(요한복음 19:23~24).

제11지점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다(누가복음 23:33).

제12지점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곳이다(마태복음 27:45~51).

제 13지점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내려놓은 지점이다(마태복음 27:59).

제14지점은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를 장사 지낸 곳이다(마태복음 27:60~61).

 

골고다 언덕, 또는 갈보리 언덕은 해골 이라는 뜻이며, 예루살렘에 가까운 아람어 지명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다(마27:33).

성묘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워진 교회로 오늘날의 구예루살렘 북서쪽의 골고다 언덕 위에 위치한다. 성분묘교회, 무덤교회라고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 십자가가 세워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19:41).

십자가의 길의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예루살렘 서쪽 성벽(Western Wall) 일부의 명칭으로 유대 민족의 신앙의 상징이자 전 세계의 유대인의 순례지인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향했다. 통곡의 벽은 구약성경에 의하면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BC 20년에 헤롯왕에 의해서 지어졌지만 이역시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무너뜨렸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여 있어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초막절 일요일이라 많은 유대인들이 성지를 순례하러 왔기 때문이란다. 유대인들은 입구쪽에서 우측은 여자, 좌측은 남자들이 모여 모세5경 등을 읽으며 소리내어 기도를 하였고, 그증에는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이곳은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유대인들의 흉내를 내어 기도를 하였다

베드로가 예수의 예언한대로 닭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게 된 곳에 세워졌다는 베드로통곡교회는 일요일이라 오픈하지 않아 외부만 보고 지나갔다. 시온 산 남동쪽 기드론 계곡(Kidron Valley)과 게헨나(Gehenna)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한다. 이곳의 지명 ‘갈리칸투(Gallicantu)’는 라틴어로 닭 울음소리를 표현하는 말로서, 닭이 두 번 울기 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3번 부인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장소를 상징한다(마가복음 14:66-72). 비잔틴 시대에 세워졌다가 이슬람에 의해 파괴된 후에 1931년에 현재의 교회가 세워졌다.

오전 관광을 마치고 12시 10분경 어느 공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였다. 다소 옹색하였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정리한 후 오후 1시 20분경 팔레스타인 지역에 위치하는 베들레헴으로 이동하여 오후 2시경 예수탄생교회와 3시 20분경 목자들의 들판교회를 관광하였다. 당초 서울항공사의 일정에는 어제의 일정으로 계획되었으나 어제의 일정이 많아 오늘 일정으로 변경되었다.

예수가 탄생한 장소를 기리는 예수탄생교회는 이스라엘 베들레헴 시내에서 남쪽로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로서 예수의 탄생 장소로 알려진 동굴 위에 지어졌다. A.D.135년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기독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이 장소에 아도니스 신전을 세웠으나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된 이후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이곳을 방문하여 아도니스 신전을 허물고 예수탄생교회를 짓게 했다. 교회는 예루살렘 대주교의 관리 아래 333년에 완성 되었으나 화재로 인해 심각한 손실을 입었고, 지금의 교회는 531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완공한 것이다. 614년 페르시아 군이 베들레헴을 점령했을 때 모든 교회를 파괴하였으나, 전승에 따르면 예수탄생교회만은 벽화에 그려진 동방박사들의 옷이 페르시아 조상의 옷과 일치하여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십자가 모양으로 건축된 예수탄생교회의 규모는 길이 52m, 넓이 24m이며 교회의 출입문의 높이는 1.2m에 불과하다. 이 문은 거룩한 장소에 말을 타고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이곳을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도록 하기 위해서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교회 내부에는 다섯 개의 복도와 붉은 석재로 만들어진 네 줄의 기둥이 있으며, 나무 바닥 밑에는 비잔틴 시대부터 보존된 모자이크 일부가 남아 있다. 제단 양쪽 계단을 따라 제단 밑으로 내려가면 각 종파가 소유하는 11개의 은제 램프와 예수탄생지점을 표시한 14개의 꼭지점을 가진 은색의 별이 있다.

이곳은 순례하는 사람은 많은데 입구가 좁고 협소하여 다른 순례장소와는 달리 매우 혼잡하였다. 외국 사람들도 많아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들어갈 수 있었다. 특히 예수탄생지점에서 한 사람씩 기도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우리 일행도 그곳에서 머리를 숙이고 한마디씩 하고 나왔고, 나도 어색하지만 양인평 장로님을 따라서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중얼거리고 나왔다.

목자들의 들판교회는베들레헴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베이트 싸호르(Beit Sahour)에 위치하며 '목자들의 들판 성당', '양치기 사원'으로도 불린다. 천사들이 들판의 목자들에게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한 곳(눅2 : 8-10) 으로 추정되는 곳을 기념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이곳은 본래 보아스의 밭이 있던 곳으로 룻기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 로마카톨릭, YMCA, 그리스정교회의 세 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그 중 로마가톨릭의 교회가 대표적이다. 그리스정교회의 교회는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6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우리 일행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오후 4시 40분경 서쪽에 있는 시온산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의 남쪽 시온문을 나서면 바로 펼쳐져 있다. 해발고도 765m이며, 유대인들에게는 정신적인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이다. 정상에는 다윗왕의 묘를 비롯하여 최후의 만찬 방, 홀로코스트의 지하실 등이 있다.

다윗왕의 묘는 '마가의 다락방' 부근에 있다. 묘는 가묘이며, 실제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왕은 다른 유대 왕들과 함께 다윗성에 안장된 것으로 추측된다(삼하 5:7, 왕상 2:10). 석실 안에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을 안치해 놓았고, 석관에는 백합이 새겨져 있으며 “이스라엘 왕 다윗이 살아서 여기 있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와 다윗의 별이 수놓아진 천으로 덮여있다. 시온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리아영면교회가 있다.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이 어린아이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며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본다. 역시 유대인들의 성경교육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가의 다락방은 '최후의 만찬 방'이라고도 한다. 다윗왕의 묘가 있는 석조건물 2층에 있으며, 예수가 12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벌인 방(막 14:12-25, 눅 22:7-13)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예수의 제자들을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장소이기도 하다(행 1 : 15, 2:1-3). 다락방 내부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서, 3개의 중심 기둥과 주위 벽을 따라 세워진 기둥들이 곡선으로 연결되어 아치를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다. AD 70년 로마 황제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했을 때에는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614년에 페르시아 군대의 침입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1176년에 다윗 왕의 무덤이 건물의 아래층에 모셔지고 윗 층은 모데스투스(Modestus)라는 수도사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다시 로마 가톨릭의 소유로 돌아 왔다.

'홀로코스트의 지하실'은 다윗왕의 묘 동쪽 건물 지하에 있다. 나치의 만행으로 숨진 유대인을 기리는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의 지방으로 만든 비누도 있다. 방 전체가 그대로 나치에 대한 고발이며, 유대인의 처참한 시련의 역사이기도 하다는데 우리의 관광일정에는 빠져 있다..

어제는 예루살렘에 비가와서 다른 관광객들은 비를 많이 맞았다면서 가이드는 일기예보상 오늘 비가 올 확률이 있으니 우산을 준비하라고 하였으나 오전에 약간의 실비가 왔을 뿐 거의 비를 맞지 않고 관광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오늘 관광에서 아쉬었던 점은 차정림권사님께서 어제 음식이 체하여 음식을 토하는 등으오늘 관광을 쉬고 호텔에 머물러 계셔야만 했다는 점이다. 함께 고통을 나눌 수도 없고,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오늘밤이 3일간 묵었던 라말라의 모벤피크호텔의 마지막날이다. 그런데 차정님 권사님이 건강이 좋지 않음은 물론 김양자권사님도 치통으로 고생이 많으시다.. 다행이 정금숙 권사님이 평소 치통이 있어 약을 준비하여 와 김양자권사님의 치통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밖에도 정금숙 권사님은 소화제 등 많은 약을 가지고 오셔서 일행의 건강을 챙키는데 도움을 주셨으니 하나님의 섬세한 돌보심을 느낄 수 있었다.

 

 8 / 9월 23일 월요일

오늘도 아침 8시 호텔을 출발하였다. 오늘의 일정은 예루살렘을 벗어나 60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향하여 예수의 고향 나사렛과 가나, 갈릴리로 향한다. 다만 나사렛에 이르기 전에 잠깐 서쪽으로 빠져 가이사랴 빌립보에 들르는 일정이다.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와 달리 남북의 도로번호가 짝수, 동서의 도로번호가 홀수이다. 미국과 달리 영국식을 채택하여 그렇다고 한다.

오늘도 팔레스타인지역의 아말라에 있던 호텔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데 검문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검문이 삼엄하다. 우리 일행을 통과시켜주지 않고 옆으로 세운다. 그리고는 우리 일행 한사람 한사람에게 여권과 비자를 보여달라고 한다. 팔레스타인 기사는 버스에 탄 사람이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데 왜 이런 엄격한 검사를 해야하느냐고 항의하는 듯 하였지만 막무가내다. 이스라엘은 군인과 경찰 2인이 1조가 검문을 한다.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갈 때는 검문을 하지 않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예루살렘 지역으로 들어올 때는 분리 장벽이 쳐져 있고, 그 통과에 검문이 삼엄하다. 이로 인하여 짐속에 여권을 넣어 둔 분도 있어 이를 찾느라고 더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떻든 팔레스타인도 이스라엘의 국토인데 팔레스타인 거주지역과 분리하기 위하여 장벽을 치고 또 검문 검색을 한다는 것이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분리장벽은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 정부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의 테러 공격 차단을 명분으로 2002년 2월부터 요르단강 서안에 건설한 장벽으로 총 건설비는 34억달러(약 4조원)에 달하며, 총연장 730km로 2004년 7월까지 약 200km 구간이 완공되었다. 장벽의 대부분 구간은 콘크리트 기반에 5m 높이의 철조망으로 돼 있으며, 장벽 한쪽에는 4m 깊이의 도랑이 파져 있다. 장벽 중 8.5km 구간은 8m 높이의 견고한 콘크리트 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콘크리트 장벽 외에도 70-80m의 철조망과 전기감지기, 2차선 순찰도로 등도 갖춰져 있다. 이로 인해 요르단강 서안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 수만명의 삶이 땅과 직업과 학교로부터 격리된채 파괴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과격분자의 테러로부터 이스라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하며 '보안장벽'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이를 '분리장벽'이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잠식하려는 이스라엘의 계략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2004년에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에게 장벽의 건설은 부당하며, 또한 자기 방어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권고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이 장벽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고,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달을 머물게 하고 싸운 아얄론골짜기(수 10:2 -14), 드릴라의 고향 소랙골짜기(삿16;4),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골짜기(삼상 17;1-58), 앗수리아의 산헤립이 점령했던 라기스(대하32:9) 등을 거쳐 10시 30분경에 이스라엘 서북쪽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원래 가이사랴는 지중해와 갈릴리호 북쪽 그리고 카파도키아에 있는 세 곳의 도시 이름이며 모두 율리우스 케사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도착한 곳은 지중해변에 있는 가이사랴인 것이다. 지중해변의 가이사랴는 팔레스티나의 가이사랴라고도 한다. BC 22-9년경 헤롯이 지금의 텔아비브 북쪽으로 50여 ㎞ 떨어진 이 곳에 그리스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고 로마의 황제 가이사랴(카에사리아)로 명명하고 그에게 바쳤다. 이 도시는 로마 황실의 호의를 사는 한편, 로마와 중동 지역 간의 무역을 장악하고자 건설된 것이다. 인공으로 형성된 도시이지만 터키의 안타키아(안디옥),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중해의 3대 항구로 꼽힐 만큼 거대하고 견고했다. 서기 6년부터 500여 년 동안 로마 총독이 상주하였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사형선고를 내린 빌라도 역시 AD26부터 10년간 이곳에서 살았는데 평소에는 이곳에 있다가 유대인의 4대 절기에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빌라도는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가야바 제사장에 의해서 끌려온 예수님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이 가이사랴에 오랜 기간동안 머물면서 신학적 이론을 정립한 곳이기도 하다. 3세기경 이 지역에서 탁월한 율법학자들이 배출되어 가이사랴 학파를 이루었으며, 알렉산드리아 출신 교부 오리게네스도 여기에 와서 신학을 창시했고, 그의 뒤를 이은 밤필루스와 에우세비오스에 의해 가이사랴 신학파가 형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프랑스왕 루이 9세가 13세기 중엽에 구축한 요새로, 본래 도시 규모는 이보다 세 배쯤 컸다고 한다.

가이사랴에는 반원형의 원형 극장이 있다. 로마는 군중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정치적인 선동과 권력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원형극장을 많이 만들었다.마치 부채꼴 모양의 반원형 극장은 일반 관객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다쪽에는 무대가 설치 되어 있다. 약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깝게 잘 보존되고 있는 극장은 음향시설도 뛰어나다. 지금도 공연이 열리고 있는 곳이란다. 지중해가 바라다 보이는 이곳은 경치 또한 절경이다. 그 왼쪽으로 전차경기장이 있다. 이곳 해안가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는 장면은 매우 아름답다. 우리 일행은 이 해변가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또한 가이사랴에는 헤롯의 겨울궁전이 있는데 크기는 110m x 60m로 중앙에 수영장이 있는데 갈멜산에서 가져온 물로 채워졌다. 바울은 로마로 끌려가기 전에 헤롯궁 감옥에 얼마동안 갖혀 있었고(행 23;33-35), 고넬료의 고향이기도 하다(행 10;1). 이곳 일대는 가이사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한다.

가이사랴에서 족장의 길인 2번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갈멜산의 엘리야 기념교회에 이르렀다. 갈멜(카르멜)산은 이스라엘 하이파의 동남쪽 3km 거리에 위치한 산악지역 전체를 통칭한다. 최고 해발은 546m이고, 전체 면적은 약 245㎢이며, 산줄기의 폭은 동서로 10km, 길이는 남북으로 약 26km로 남쪽으로 비옥한 샤론평야가 있다. 갈멜산은 고대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으며, B.C.16세기의 이집트 문헌에 ‘거룩한 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였으며, 예언자 엘리야갸 바알 신의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한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왕상 12:20-24). 엘리야 기념교히는 엘리야가 희생제물을 바친 장소로 알려진 무흐라카(Muhraqah)에 1883년에 복원된 카르멜 수도원이다(왕상 18:21). 마당에는 엘리야가 칼을 들고 있는 동상이 있고, 교회의 옥상에서는 멀리 이스르엘평야가 보인다. 이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른 가나안이란 이곳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산비탈에는 아름다운 공원과 숲들이 곳곳에 있으며, 대부분 갈멜 자연보호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아가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갈멜 산의 아름다움에 비유한다(아가서 7:6, 35:2). 남서쪽 경사면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는데,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고고학자 도로시 게로드(Dorothy Garrod)가 그 중 4개의 동굴과 바위들을 조사했다. 게로드는 그곳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초기 인류의 거주 흔적을 발굴했다. 또한 B.C.4천년 경 신석기와 청동기의 과도기 시기의 팔레스타인 주거지와 항아리 무덤도 발굴되었다.

갈멜산 수도원을 관람후 12시 43분경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시작하여 오후 1시 20분경 므깃도로 향하였다. 므깃도는 요한계시록에 언급되는 아마겟돈으로 잘 알려져 있고, 밀농사로 유명한 이스르엘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요새이다. 가나안을 장악하려면 므깃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므깃도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고대로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34번의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제국을 세우기 위한 전쟁이었다. 므깃도 평야에 대하여 나폴레옹은 “전쟁을 위해 이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35번째의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일 것이다(계16:12-14,계19:19-21,계14:19-20,사63:3,슥14:3-4).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시대에 이기는 이들이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아마겟돈으로 내려와 마지막 전쟁에 참여하는 용사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신실하게 달려야 한다. 므깃도 유적지는 대규모 발굴이 이루어져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석기시대의 신전 유물과 철기시대의 건물과 솔로몬 시대의 방어벽이 있는 성문과 마굿간, 아합시대의 거대한 지하 수로, 여로보암 시대의 곡식창고가 발견되었고 우리도 이러한 것들을 관람할 수 있어 당시의 문명상을 볼 수 있었다.

므깃도를 순례후 2시 20분경 예수의 고향 나사렛으로 이동했다. 나사렛으로 이동하면서 예수님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서 변화하신 다볼(타보르)산(마17장)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다볼산은 이스라엘 갈릴리 저지에 위치한 산으로, 높이는 해발 588m이며 갈릴리 호에서 서쪽으로 18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다볼 산 정상에는 1921년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서기 4세기 비잔틴 제국 시대의 교회 터에 세운 예수의 변화(마태복음 17장) 기념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주위에는 십자군 시대의 성벽과 건물의 유적이 있으며 특히 개신교인들은 이 산을 변화산이라고 통칭해 부르기도 한다. 또한 나사렛 구도시의 남쪽 지형과 이스르엘 평원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며, 케두밈 산(Mt Kedumin, 397m)의 절벽 부분에 위치한 벼랑산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은을 책망하시자 사람들이 분노하며 예수님을 끌고 이 벼랑산 낭떠러지까지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지만(눅 4:29) 예수님은 유유히 그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가버나움으로 가시게 된다(눅 4:30).

2시 50분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 도착하여 예수님 수태고지기념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를 들렀다. 나사렛시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원형모양의 큰 건물이 바로 수태고지 교회이다. 처녀인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예고를 받는 장소에 세워진 교회이다. 중근동에서 가장 큰 삼각지붕의 대성당으로 프란체스코 가톨릭수도회 소속이다. 교회 지하에는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던 동굴(Grotto of the Annunciation)이 보존되어 있다. 이 동굴 위에 비잔틴시대와 십자군시대, 18세기에도 계속 교회를 세웠는데, 오늘날의 건물은 5번째 교회로 이탈리아 건축가 조반니 무치오(Giovanni Muzio)가 설계하여 1969년 완공한 것이다. 교회 지붕은 백합 모양으로 설계하였는데,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 백합이었다고 한다. 교회 정면 윗부분에는 마리아와 가브리엘천사의 모습, 중간 부분에는 4복음서의 상징, 출입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부조로 묘사해 놓았다. 성당 2층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성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한국에서 온 성화는 마리아가 한복을 입었고, 예수는 색동저고리를 입었으며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고 써져 있다. 수태고지교회를 거쳐 3시30분 가나의 혼인잔치 기념교회(Cana Franciscan Church) 및 그 옆에 있는 나다나엘 집터를 관람했다.uuujhjuoooo

가나는 나사렛 북동쪽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동네에 들어서면 골목 양쪽에 포도주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예수가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잔치가 열렸다(요2:1-10)고 알려진 곳에 1879년 프란치스코교회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를 건축하였다. 아직도 건물의 지하에는 옛 포도주 항아리가 보존되어 있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안에 있는 돌항아리는 추정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교회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신 곳이기도 하다.(요4:46-50). 그리고 가나는 사도 나다나엘(Nathanael, 일명 바돌로매, Batholomew)의 고향이기도 하여(요21:2), 나다나엘 집터로 알려진 장소에 세워진 나다나엘 기념교횔 또한 볼 수 있다.

4시 25분경 갈릴리 바다로 향했다. 성갈릴리 바다는 중동 최대의 담수 호수다.성경에서는 긴네롯바다(수12:3), 게네사렛 호수(눅5:1), 디베랴(티베리아스) 바다(요6:1)라는 등으로 불린다. 요르단 강(요단 강)은 그 호수의 한쪽 끝으로 흘러들어가 맞은편의 사해로 나간다. 숲이 우거진 언덕과 비옥한 평야로 이루어진 갈릴리는 예수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며 공생애 초기 사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베드로 등 제자들을 부르시고(눅5:1-11), 호수의 거센 폭풍을 잠재웠고(마가복음 4:39), 한번은 풍랑이 이는 수면 위를 걷기도 했다(마가복음 6:45-53). 가이드 우목사님은 당초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갈릴리 호수 위의 유람선 탑승을 내읠은 요르단을 입국하는 절차가 있어 바쁘기 때문에 오늘 하자고 했다.

우리가 탑승한 배는 꽤 큰 배였다. 우리가 탑승하자 홀리클럽성지순례단을 환영하는 플랭카드가 부쳐져 있었고, 정대준 장로에게 선장 모자를 씌워주면서 임시선장으로서 배에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배려를 하였다. 태극기를 게양하는 동안 애국가를 틀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명일 목사님은 마가복음 말씀을 본문으로 삼아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셨다. 갈릴리는 호수임에도 바다와 같이 넓었고, 지형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아침에는 바다에서 산으로 오후에는 산에서 바다로 바람이 블어 가끔 폭풍이 일었다고 한다. 그날도 맑고 고요한 날씨임에도 바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우목사님의 설교를 통하여 다시한번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실감하면서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마음껏 찬송을 했다. 때마침 울리는 찬송가 곡조에 맞추어 여자 권사님, 집사님들은 즐겁에 춤을 추었다.

선상예배를 마친 우리는 호숫가에서 건강이 좋지 않아 관광을 생략하신 차정림권사님과 양인평 장로님을 만나서 6시경 CLUB TIBERIAS 호텔로 향했다. 이 호텔은 현대식 호텔은 아니었지만 갈릴리 호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경관이 좋은 호첼이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은 예수님이 군대귀신을 돼지때에게 몰아넣어 몰살시킨 거라사지방이 있다고 한다. 저녁식사는 역시 뷔페이지만 해물들이 많아 풍성히 먹을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자기가 싫어 몇몇 사람들은 삼삼오오 때를 지어 호텔 여기 저기를 관람하였으나 쉴만한 곳이나 볼거리가 있지는 않았다. 겨우 수영장을 찾아 들어가서 담소를 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청소를 한다면서 나가라고 한다. 그런데 직원들의 말을 가장 먼저 알아듣는 사람은 정대준 장로님의 사모님 김양자 권사님이었다. 영어 실력보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인 것 같다.

 

 9 / 9월 24일 화요일

오늦 역시 날씨가 맑다. 이스라엘을 관광하기 좋은 시기는 지금과 같은 건기이면서 날씨도 비교적 덜더운 9월과 10월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우기에 이스라엘을 관람하는 것도 또다른 멋이 있는데 그 때는 와디가 흐르고 꽇이 피어 매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볼 수가 았어 또다른 여행의 묘미가 있다고 한다.

오늘은 이스라엘 관광의 마지막으로 오후에는 우리 관광의 마지막 나라인 요르단으로 들어가는 날이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보게 된 갈릴리 후수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장면은 너무 아름답다. 아침 6시 49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홍권사를 창가에 세우고 일출 장면을 찍었다. 8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기사가 늦게 나타나 우리 일행이 기다리도록 하였고, 이에 가이드가 싫은 소리를 하였는지 기사가 운행을 거부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 팔레스타인 기사는 젊은 기사인데 버스의 전면에 홀리클럽 여행단이라고 쓴 글씨도 붙이지 못하게 하는 등 까다롭고 서비스 정신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늘 불만이 가득차 있는 듯이 보였고 시간만 나면 핸드폰에서 논을 떼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소 지체된 8시 30분경 호텔에서 출발하여 9시경 팔복교회에 들렀다. 팔복교회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산상수훈 중에 팔복에 대해 설교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예수의 설교는 성경 마태복음 5-7장, 누가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각각의 기록에 등장하는 장소가 약간 차이는 있으나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이라는 점은 일치한다. 오늘날 팔복산 혹은 수훈산으로 믿어지는 장소는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Capernaum)과 게네사렛(Gennesaret) 사이에 위치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타브가(Tabgha)에서 약 3km 거리에 있다(마14;13-21, 막6:30-44, 눅9:10-17, 요6:1-14). 팔복교회 역시 갈릴리 호수를 배경으로 세워진 매우 아름다운 교회이다.

9시 30분경 팔복교회를 나와 10시 30분경 가이샤라 빌립보에 도착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헤롯왕이 기원전 20년경에 로마의 초대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로부터 하사받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아구스도의 신전을 짓고, 황제의 이름을 따라 가이사랴 라고 불렀는데, 후에 헤롯의 아들 빌립이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 빌립의 가이사랴 라고 부르면서 가이사랴 빌립보가 되었다고 한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를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그 신전 앞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고, 주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마 16:13-19, ,막 8:29,눅 9:2)라고 베드로를 축복하셨던 곳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이방신전 앞에서 제자들에게 신앙훈련을 시키셨으니 에수님이 얼마나 치밀하게 그리고 시청각적으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는가를 알 수 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국경에 해당하는 안티레바논 산맥(시리아와 레바논의 국경지대를 따라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솟아 있는 중동지방의 산맥) 최남단에 있는 높이 2,814m의 헤르몬(Hermon)산 남쪽에 경치가 좋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헤르몬 산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 강수량이 많은데(약1,500mm) 주로 눈으로 내려 여름까지 눈이 쌓여 있다. 그 눈이 녹을 때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산이 그것을 흡수했다가 가이사랴 빌립보지역에서 뿜어내어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갈릴리 바다로 흘러가는데, 경사가 급한 곳을 흘러가다가 시원한 폭포(반니아스 폭포)를 이루기도 한다. 그 강과 단샘에서 흐르는 강물이 합류하여 상 요단강을 이루는데, 갈릴리 호수 위쪽에 있다하여 상 요단강이라고 부르고 갈릴리 바다에서 사해 바다로 흐르는 강을 하 요단강이라고 부른다. 성경에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돼찌떼에 들어가게 하여 고친 사건이 나오고 돼지를 불결하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왜 돼지를 키웠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는데 이 돼지들은 이방신들에게 제사할 때 사용되어 그 필요상 돼지를 키웠다고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방신에게 바칠 돼지때를 죽여서 한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이니 여기에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점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2가지 교훈을 가르쳐 준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도 우상이 이글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의 참 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생령력있는 신앙생활를 하여야 하겠다.

10시 50븐경 텔단으로 양했다. 텔단은 이스라엘 북쪽 헬몬산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헬몬산의 만년설 때문에 풍부한물이 흐른다. 콸콸 물이 흘렀고 공원내가 물소리로 쿵쿵대어 별천지에 온 것 같아 상쾌하기 그지 없다. 텔단공원은 숲도 무성하여 마치 딴나라에 온 것 같았다. 지금의 텔단은 단 지파의 성읍으로(삿18:29), 단 지파가 정복하기 전에는 라이스 또는 레셈(수19:47)이라고 부르던 곳이다. 단은 북이스라엘 왕국때 여로보암이 벧엘과 이곳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게 하였기에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왕상12:28~29). 텔단의 텔(Tel)은 주거지의 부서진 흙더미가 퇴적하여 이룩된 인위적인 언덕을 말하며, 단은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할 때마다 언급되는 성읍으로 여로보암이 제단을 세운 곳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텔아비브처럼 많은 지명에 텔이 붙는다. 텔단은 이스라엘 전역에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이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헐몬산(해발 2814m)의 눈 녹은 물이 땅속을 흘러 이곳에서 솟아나 이스라엘의 젖줄인 요단강을 이룬다.

텔단의 산책을 마치고 12시 40분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잡은 물고기를 요리하여 만든 음식을 상징하여 그 고기를 먹는 것으로 알려진 식당에셔 구은 베드로의 물고기로 점심식사을 하였다. 뼈채 먹는데 괘 맛이 있었다. 1시 30분 점심을 마치고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 가버나움으로 향한다.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 현재의 텔 훔(Tell Hum)이 그 터로 알려져 있으며,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다. 가버나움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근무하던 로마의 군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 믿음으로 그 하인의 병을 고친 일도 있었다(마8:5-13, 눅7:1-10).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침 받았고(마8:14-17, 막1:29-31), 귀신 들린 자(막1:21-28, 눅4:31-37), 중풍병자(마9:1-8,막2:1-13), 그 외에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던 곳이다(마8:16-17, 막1:32-34, 눅4:23, 40-41). 그리고 예수님은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생명의 떡에 관해 가르치셨던 곳이기도 하다(요6:1-59). 특히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들어가 치유 받은 사건도(막 2:1- 12)있었는데, 이는 갈릴리 지방이 현무암 지대여서 그 돌로 집을 짓고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는 형태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버나움, 고라신, 벳세다 등에 가장 많은 이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마11:20-23) 두로와 시돈, 소돔성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예언한대로 6세기에 퇴락해서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한때 5,000명 내지 20,000명의 인구가 있었지만 지금의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숫가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 더미로 유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당시 상당한 재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베드로의 집과 가버나움 회당을 관람하였다. 예수님이 장모를 치유한 베드로의 집(마 8:14, 막 1:29-31)은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으며, 붉은색 반구형의 지붕을 가진 그리스 정교와 같은 건물이다.

어떷든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나녔지만 공생애 3년 동안 갈릴호수를 중심으로 가나, 고라신, 벳세다, 특히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활동하시고, 유월절 무렵에는 예루살렘까지 올라가 활동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고 갈 때 주로 다니셨던 길이 있는데 그 길의 길이가 약 110 내지 120㎞가 된다. 오늘날 그 길을 복원하여 표시를 하여 놓았는데 그 길을 따라 걸어서 순례하는 관광상품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14시경 오병이어 기념교회를 들렀다. 막달라의 북쪽에 있는 타브가(하)는 산상수훈을 설교한 언덕 기슭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교회는 도로 오른쪽에 있는데, 붉은 벽돌지붕의 에스파냐 양식의 건물이다. 예수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남자만 5,000명에게 골고루 나누어 먹이고 12바구니가 남았다는기적(마14;13-21,막6;30-44,눅9;10-17,요6;1-15)과 떡 7개로 4,000명에게 먹이고 7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막8;1-10)의 장소를 기념하여 세웠다. 교회는 1936년에 베네딕트수도원으로 수복되었으며, 내부에는 물고기와 빵을 그린 5세기의 모자이크가 남아 있고, 당시 바구니 크기를 추정하여 만든 바구니가 있다. 바구니 앞에서 일행들은 사진을 찍어 바구니의 크기를 사람의 키와 대비하여 파악하는 동시에 이 교회를 방문한 사실을 기념하였다. 이곳에서 걸어서 10분 정도후에 도착한 곳이 베드로 수위권교회이다. 이 교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막혀 사망한 뒤 부활하여 사도 베드로에게 나타나 그의 고백을 듣고 지상 사명을 맡겼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요21:16) A.D.4세기경 세워진 교회로, 갈릴리 호수가에 위치하여 매우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에 취해 여기서도 일행들은 사진 찍기에 바빴다. 이 교회는 그 후 1263년 이슬람 통치기에 파괴되어 약 700년간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33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의해 임시 교회가 세워졌고, 1982년에 증축되었다.

베드로 수위권교회의 관람을 마친 우리는 14시 30분경 요르단 입국을 위하여 벳산국경으로 향했다. 이스라엘로의 입국절차가 복잡하지 요르단으로의 입국절차는 비교적 간단했다. 다만 이스라엘을 출국한 후 요르단 입국장까지는 버스를 타야하는데 버스가 만원이어서 승차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짐을 실을 장소가 부족하여 다음차로 오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차까지는 30분을 더 기다려야한다면서 가이드는 특별히 담당자에게 부탁하여 승차를 하게 했다. 역시 한국사람은 안되는 거을 되게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16시 40분에 요르단에 입국할 수 있었다

요르단에 도착하자 요르단에서 선교사를 하시는 김수호 목사님이 우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셨다. 김목사님은 아주 순수하고 가이드에 열심이 있었다. 말씀을 천천히 하여 처음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갈수록 매력이 있는 분이었다. 숙소가 있는 암만으로 달려가는 중에 17시 30분 경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다는 얍복강을 지났다. 그러나 우리가 당시 본 얍복강은 성경을 읽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보잘 것 없은 작은 강이었다.아마도 건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르단은 아시아 서남부 중동지역(북위 28°~33° 및 동경 35°~39°)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동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 북동쪽은 이라크, 북쪽으로는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국토의 면적은 8만 9342㎢이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영도하에 이 지역을 정복하고 르우벤, 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하였다. 나바트 시대, 로마시대를 거쳐 7세기 이후 이슬람화되었다. 1927년 영국의 위임통치 하에서 트랜스요르단(요단고원) 수장국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땅 이름이 요르단강 서안지역으로 한정되었다. 1946년 영극으로부터 독립하였고, 1949년 팔레스타인과 합병한 후 정식국명이 요르단 하세미트 왕국으로 변경되어 독립국가가 되었다. 요르단의 국토는 비옥한 서부의 요르단 계곡과 대부분의 도시들이 자리하고 있는 동부 고원,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이어진 동부 사막지역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요르단은 세렛강, 아르논강, 얍복강, 아르묵강을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지역을 구분할 수 있다. ① 홍해에서 세렛강까지 사해남부 모압산지는 에돔 족속이, ② 세렛강에서 아르논강까지 사해동부 모압산지는 모압 족속이, ③ 아르논강에서 얍복강까지 요단강 동편지역으로 상부지역은 암몬 족속이, 하부지역은 아모리 족속(민 21:21-26)이(르우벤지파에게 분배) 각 거주하는 지역으로, ④ 얍복강에서 야르묵강까지는 길르앗산지(갓지파와 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로, ⑤ 야르묵강 이북은 골란고원 바산산지(므낫세 반지파에게 분배)이다. 국가의 최고 행정권은 국왕이 가지고 있으며 국무총리를 통해서 행사하고 있고, 납북한 동시수교국이다. 요르단의 기후는 반건조성의 지중해성 기후를 보인다.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며(섭씨 18°C - 41°C), 겨울에는 선선하면서도 우기이고 춥다(섭씨 2°C - 12°C). 특히 여름에는 일교차가 크므로 감기에 주의해야 하며, 겨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추우므로 추위를 대비한 두꺼운 스웨터 등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요르단의 가장 큰 특징은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국가라는 점이다. 요단강, 야르묵강, 아르논강, 얍복강 등 4대강이 있으나 수량이 많지 않고 우기에도 비가 자주 오지 않아 만성적인 물 부족을 겪고 있어 1주일에 1회 물을 배급받아 사용한다. 매년 1월경에는 한두 차례 폭설이 내려 일부 도시 기능이 마비되기도 하고, 4월~5월에는 사막에서 돌풍을 동반한 황사가 발생하여 가끔 도로가 차단되거나 공항이 폐쇄되기도 한다. 국민소득은 1인당 GDP 5,000불 정도로 세계95위이다. 외교를 잘해 이집트보다는 잘 산다. 요르단은 자존심이 강하여 부끄럽게 하면 참지 못하고 살인을 하기도 한단다. 이슬람 수니파가 92%, 카톨릭이 4%, 기독교는 0.4%로 이슬람국가이다. 인구는 650만 정도인데 수도 암만에 25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할랄, 하람이라고 불리는 종교법이 강하게 지배한다.7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형제상속이 원칙인 점이 특색이라고 한다.

암몬의 중심지 암만시내는 트래픽이 심하여 예상보다 우리가 묵을 AMMAN CHAM PALACE 호텔까지 가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신 차정림 권사님이 급하게 화장실을 가시고 싶단다. 그러나 화장실이 있는 정차할 장소가 없어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다행이 버스 안에 화장실이 있어 그곳에서 화장을 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의 화장실은 처음 보았는데 장거리 여행에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은 비교적 현대식이었으나 한국의 일류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차정림 권사님은 아직도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저녁을 함께할 수 없었다. 체하고 기력이 없는데는 포카리스웨트가 좋다고 하지만 요르단에서 포카리스웨트 또는 동 종류의 음료를 사기가 무척 어려웠는데 정대준 장로님이 수소문하여 사오셨다. 다른 일행도 일찍 자기가 뭣하여 돌아다니다가 수퍼마켙에서 내일 페트라 관광을 가면서 간식으로 먹을 과일 천도복숭아를 샀다. 단체 여행을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공동경비를 갹출하는데 회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가이드에게 주는 경비외에는 갹출하지 않다보니 다소 어려움이 있었으나 원할한 여행을 위해서 회장으로서 뒤에서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10 / 9월 25일 수요일

 오늘의 일정은 요르단 여행의 하이라이트 페트라를 다녀오는 것이다. 거리가 멀어 아침일찍 7시에 출발해야 했다. 차정림 권사님은 오늘도 여행을 할 수 없어 호텔에서 쉬시기로 했고 양인평 장로님도 간호차 함께 쉬시기로 했다. 병원을 찾아 보는 것도 생각했으나 요르단의 의료시설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고 한국의 주치의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여 그냥 쉬는 것으로 대체하기로 하신 것이다. 암만시내는 아직 개발이 덜되어 있었다. 42층 건물이 제일 높은 건물인데 5년간 짓고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니 속전 속결에 익숙한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특이하였다. 요르단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길이다. 원래 사해 서쪽으로 가면 더 빨리 갈 수 있었으나 에돔왕이 거절하여 사해 동쪽 요르단 쪽을 거쳐 가게 되었다고 한다. 페트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김수호 목사님은 내내 성경과 요르단과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쉬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고이 간직하고 있던 유대인의 화페 세겔, 데나리온, 나드, 겨사씨, 쥐엄열매, 할례칼 등을 직접 가지고 와 일일이 보여주면서 설명하여 주어 회원들로부터 좋은 평을 들었다.

우리는 8시 50분 십자군의 성채 카락성(Kerak)에 도착하였다. 아르논 남쪽 28.4㎞, 사해 동쪽 17.6㎞에 있는 고대 모압의 수도이며 길하레셋라고도 한다. 멀리 사해와 요르단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준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실제 무대였던 성이기도 하며, 구약 성경(사16:7,11;렘48:31,36;사15:1)에 등장할 정도로 오래된 도시이다. 지형적인 요소에 의해 삼면이 1000m 고지의 언덕으로 싸여져있으며 시리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던 카라반 교역로 사이에 위치해 있고 로마제국 때는 샤락 모아바로 불렸다고 한다. 카락성의 문은 오토만문과 십자군문 두 개인데 지금은 오토만문만 출입이 가능하다. 카락성은 ‘왕의 대로’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현재의 카락성은 십자군전쟁이 한창이던 1142년 십자군의 중요한 거점으로 볼드윈 1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1293년 지진으로 일부가 붕괴되었다. 카락성은 지하 5층 규모로 완공에 5년이 걸렸을 정도로 견고하다. 지하엔 물 저장고와 병사들이 거주하던 좁은 방,아치형 복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수로로 추정되는 150m 정도의 터널이 있다. 1924년의 발굴을 통해 모압인과 로마시대부터 중세 아랍시대이 도기들이 발견되었다. 통로가 미로처럼 되어 있어 일행중 일부는 가이드를 놓져 따라가지 못하기도 하였다. 카락성에 주둔지를 정한 십자군은 이슬람의 전쟁 영웅인 살라딘의 1년여에 걸친 끈질긴 고사작전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요새 덕분에 잘 버텨냈다. 카락성이 함락될 것 같지 않자 살라딘은 여동생을 투입했고 살라딘의 여동생은 마치 거리의 여인처럼 십자군 병사들을 유혹하여 카락성의 비밀통로를 알아내게 된다. 결국 비밀통로가 이슬람에게 넘어가자 1년여를 버티며 항전하던 십자군들도 1189년에 손쉽게 무너져버렸다니,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죄의 유혹을 이기는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는다.

9시 50분 카락성을 떠난 우리는 11시 55분 경 요르단 남부 아카바 행정구(Aqaba Governorate) 와디무사에 있는 모세의 우물에 도착했다. 현지어로 ‘므리바 샘’이라고 하며 와디무사 입구의 시멘트 건물 안에 있다. 성경에 의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모세의 기도로 물을 얻게 된 곳이라고 전해진다(민2장). 모세의 샘 옆에 모세가 내리친 바위가 있다. 옥상에 3개의 흰색 돔이 있는 건물 주변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인데도 이 샘에서는 1년 내내 샘물이 솟는다고 한다. 1.5km 떨어진 고대도시 페트라는 강수량이 부족하고 물이 없어 이곳에 수로를 연결하여 물을 공급받았다. 이곳 바로 옆에서 12시 10분부터 40분까지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정순출 권사님이 일행들을 섬기는 마음으로 킬하레셋 어느 시장에서 과일을 사서 나누어주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정대준 장로님과 오해가 있어 식당에서 두분 사이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있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잘 극복하는 헤프닝도 이번 여행의 한 추억이 될 것이다.

암만(Amman) 남쪽 262km 지점에 위치한 바위로 이루어진 고대도시 페트라는 유네스코(UNESCO)가 지정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성경에는 '셀라'라고 나온다(민23:9, 민 24:21, 민 31:8, 수 18:19, 수 13:21, 삿 1:36, 대하25:11-12, 욥14:18, 욥18:4, 욥24:8, 욥28:9, 욥30:6, 욥39:28, 시18:2, 시27:5, 시 60:9, 시31:2, 시61:2, 시71:3, 시74:15, 시89:26, 시92:15, 시104:18, 시141:6, 렘 4:29, 렘 48:28, 렘49:16, 암 6:12, 욥 1:3-4, 나 1:6, 삿 1:36, 왕하 14:7, 왕하 14:7, 고후 11:32). 페트라는 아브라함의 후손 에돔족의 수도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이곳을 통과하려 했으나 에돔왕이 거절하여 페트라 주위 아라바 광야에서 38년간을 지냈던 곳이다. 모세의 형 아론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특히 붉은 색 바위산과 절벽이 많고 건물 역시 바위로 만들어졌다. 나바테아 인들이 바위를 파내고 다듬어 수십 채의 집과 신전 등을 지은 것인데 도시 이름인 '페트라'는 '바위'를 뜻하고, 사도 베드로란 이름도 이 페트라와 어원이 같다. 페트라는 BC 600년~AD 100년에 아랍족인 나바티안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현재 요르단과 시리아지역까지 세력을 펼친 고대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다. AD 106년에 로마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수자원의 고갈로 폐허가 된 곳으로 1812년 스위스 여행자 요한 루드비히 부르크하르트(Johan Ludwig Burckhardt)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높이 200m의 바위산과 폭 2m~3m의 ‘시크(Sip)’ 협곡이 1.5km에 달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을 말을 타고 가기도 하지만 구태어 말을 탈 필요가 없이 걷는 것이 더 좋다. 더운 사막의 날씨임에도 시원하고, 곳곳의 협곡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바위의 어우러짐은 상상으로 그릴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시크'로 불리는 좁고 어두컴컴한 바위 협곡을 따라 도시 중심부로 들어가면'보물창고'라는 뜻을 가진 알 카즈네 신전이 나온다.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서 BC 1세기 무렵에 건설한 나바테아(Nabatea) 왕, 아레타스 3세(Aretas Ⅲ)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높이 43m, 너비 약 30m 규모의 2층 신전 형태의 건축물이다.

1층 부분은 6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1층 중앙 기둥 좌우에는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인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 기마상을 새겨놓았다. 맨 위쪽에는 파손된 채로 있는 독수리상 2개가 있고 2층 중앙의 원형으로 만든 톨로스(tholos)에는 ‘알-우자(Al-Uzza, 풍요의 여신)’가 조각되어 있다. 이 거대한 기둥들과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 장식들은 따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니라 사암 절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들었다. 화려한 입구와는 달리 내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사각 모양의 방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뚫려 있단다. 알 카즈네 신전은 '보물 창고'라는 뜻처럼, 고대 이집트 왕인 파라오의 금은보화가 묻혀 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나바테아 인의 뛰어난 건축 솜씨를 엿볼 수 있는 건축물로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촬영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페트라에는 33층 계단으로 이뤄져 3000여 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는 형 원형 극장과 바위 틈틈이 뚫려 있는 수십여 개의 동굴 무덤과 교회터 그리고,'시크' 협곡길 양 옆으로 깎아서 만든 수로 등은 당시의 문명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위 원형극장은 마이크가 없지만 한가운데서 노래를 부르면 전체에서 잘 들릴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여 성악을 전공한 이은수 권사가 찬양을 하였는데 역시 소리가 크고 아름답게 들려 참으로 신기하였다.

오후 3시 30분 페트라를 출발하였다. 일몰전까지 아르논강까지 가서 아름다운 서양의 일몰과 함께 아르논계곡을 관람하기 위해서 더 지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시 30분 에돔과 모압의 경계 세렛강에 이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앱굽시 가네스바네아에서 이곳 세렛강까지 38년이나 소요되어 와서(신 2:12-14)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출애급당시의 백성은 사망한다. 여기서부터 고속도로가 아닌 왕의 대로를 따라 북상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관람하여서 좋지만 구부러진 길을 가는 기사는 불평이 많다고 한다. 롯의 후손인 아모리, 모압, 암몬 조속이 거주하였던 지역을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다행히 일몰전인 18시 5분경 아르논강을 거쳐 아르논 계곡에 이르렀다.

아르논 강은 ‘와디 무지브(Wadi Mujib)’라고 알려져 있다. 강의 길이는 72km이며 수도(首都) 암만에서 남쪽으로 84㎞ 되는 지점에 있다. 강은 사막의 고지대에서 시작되어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하류 쪽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사해(死海)로 흘러든다. 강 너비는 대부분 좁은 편이며 석회암 구릉지대와 사해 사이에서 너비 30m의 넓고 얕은 강어귀가 형성된다. 여름에 수량이 적지만 비가 내리는 겨울에는 물이 격렬하게 흐르며 장소에 따라 깊이가 2-3m까지 이르기도 한다. 골짜기는 너비가 몇 km에 이르며 아르논 댐, 다리가 있고, 다리 서쪽에 로마시대의 다리 흔적이 있다. 깊고 가파른 골짜기로 인해 고대부터 오랫동안 아모르와 모압의 경계선이 되어왔다. “거기를 떠나 아모리인의 영토에서 흘러 나와서 광야에 이른 아르논 강 건너편에 진을 쳤으니 아르논은 모압과 아모리 사이에서 모압의 경계가 된 곳이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민 21:13-15). 또한 요단 동편을 정복할 때 아르논이 언급된다. “너희는 일어나 행진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은즉 이제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하라”(신 2:2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는 길르앗에서부터 아르논 골짜기까지 주었으되 그 골짜기의 중앙으로 지역을 정하였으니 곧 암몬 자손의 지역 얍복 강까지며”(신 3:16)라고 기재되어 있다. 어떻든 석양의 아르논 계곡은 황량하면서도 방대하고 장엄하여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정도로 아름다웠다.

 

 11 / 9월 26일 목요일

 오늘은 드디어 한국으로 향하는 날이다. 아무리 좋은 여행이라도 10일이 넘으면 집이 그립다. 하물며 그야말로 순례일정인 이번 여행은 고단하기 그지 없다. 그래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리고 우리 주님의 흔적을 따라서 성지순례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2일간 묵었던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BC 5세기경부터 있었던 옛 도시로, 성경의 라바트암몬과 일치한다. 조카인 롯과 그 딸 중 한 명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벤암미의 자손으로, 사해 북동쪽 뱝복강 유역에 기원전 15세기말경부터 계속 살아온 암몬인의 수도이다. 기원전 58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정복된다. 암만은 헬레니즘 시대에 필라델피아라고 불렸다. 암몬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다윗왕의 동침명령에 거부한 결과로 격전지로 보내져 전사한 곳이다. 나는 그동안 우리아는 충성심이 강하여 다윗의 동침 명령에 거절한 것으로 알아 왔으나 실제로는 다윗과 아내 밧세바의 통정사실을 알고 이에 반항하여 공의를 드러내고자 아내와의 동침을 거절한 것이라고 김수호 목사님은 설명하였다. 모세의 통과를 거절한 헤스본 왕 시혼은 이스라엘에게 진멸을 당했다(신2;23 이하)고 하는 헤스본이 근처에 있다.

호텔에서 출발하여 10시경 도착한 곳은 마다바 교회{성 조지(St. George) 교회}이다. 마다바(Madaba) 또는 매디바는 암만 남쪽 32km 지점에 있는 왕의 대로(King's High Way)상에 위치한 도시로서 청동기시대에 형성되었다가 74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다. 이후 19세기 초 ‘카락’ 지방에서 약 2,000명의 기독교인이 이주하면서 재개발되었는데 비잔틴시대의 모자이크가 다수 발견되었다. 암만에서 남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 느보산까지는 서쪽으로 약 9km 정도가 된다. 매드바라고 하는 지명은 성경 역대하 19장 7-15절까지 보면 "저희가 와서 매드바 앞에 진 치매 암몬자손이 그 모든 성읍으로 조차 모여와서 싸우려 한지라 다윗이 듣고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내어 이곳에서 격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다바 교회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다.

성 조지 교회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1896년에 발견된 천연색 돌 모자이크화 때문이다. 성조지 기념교회 바닥에는 AD 560년경에 만든 세계 최고 최대(25 X 5m)의 모자이크 지도가 있다. 이 모자이크 지도는 천연돌 약 200만 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가지 색깔과 도형으로 당시 팔레스타인지역뿐만 아니라 이집트 나일강부터 터어키까지 나타내 성서지리학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지도에는 당시의 예루살렘의 지도가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고 또한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부터 시내산, 요르단, 갈릴리 호수나 사해 그리고 이스라엘이 비교적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 성의 중앙에 로마식 도로(카르도, 직가)와 건축물들이 정확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는데, 1967년 이후 예루살렘 발굴 작업 시에 이 지도에 나타난 건축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성조지 교회 및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 등을 찍은 후 11시경 느보산으로 향하여 11시 20붅경 느보산에 도착했다.

마다바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 지점에 해발 805m의 느보산(Mt. Nebo)이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킨 모세가 40년 만에 도착하여 사해 건너편의 가나안땅을 바라본 후 120세의 나이에 사망한 곳이다(민수 27:12~14,신명 32:48~52, 34:1~8). 이 산은 3개의 중요한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니바(Ras al-Niba)로 높이 835m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m 무카야트(Khirbetel-Mukhayyat)이며,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m의 시야가(Ras Siyagha)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비스가 봉우리는 이 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실제로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사해(死海)와 그 서북면에 위치한 초기 예수 시대의 유대교 수도원 유적지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여리고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에 있는 올리브산 꼭대기 등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이다. 느보산 정상에는 AD 6세기경의 모세 기념교회와 수도원이 세워져 있으며, 교회 내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내주는 모자이크가 있다. 모세 기념관 앞에는 가나안땅을 바라보며 뱀과 십자가를 형상화 한 조각물이 세워져 있다. 이는 모세가 불뱀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 위대한 모세가 그토록 가곡 싶었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물을 달라고 불평한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솟아나게 했다(민 20;10-11) .불순종에 화가난 모세가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이 나오게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감정을 담아서 너무 지나치게 표현했던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가네스 바네아는 오래 전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곳이다(민13;1-14;38).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훈련을 받아야 했던 그들이 또 한번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던 것이다(민21;5), 그리고 이런 백성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른 모세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혈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일로 인해 결국 모세와 아론은 눈 앞에 가나안 땅을 두고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고(민20-12), 그 말씀대로 모세는 이곳 느보산에서 사망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 가혹하지 않나하는 생각도 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엄정함과 준엄함을 느끼게 한다. 한편으로 비록 모세가 가나안 땽에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모세의 위대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2t시경 느보산을 떠나 오후 1시 10분경 암만 국제공항에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수속을 밟은 후 오후 4시경 EY516편에 탑승 4시간을 달려 오후 8시경 아부다비에 도착, 10시 15분 EY 876호로 아부다비를 출발했다.

 

 12 / 9. 27. 금요일

 비행기에서 힘들게 하루밤을 보낸 후 11시 45분경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차정님권사님이 몸이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여 돈이 아깝지만 비즈니스석을 구하여 탑승하였다. 사실 몸이 좋더라도 70세가 넘은 연세에 그 긴 여행을 하려면 비즈니스석을 타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코노미석으로 여행하였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막으신 것이다. 어떻든 비즈니스석 덕분에 2분은 먼저 짐을 찾았고, 건강 때문에 먼저 귀가하셨다. 나머지 일행은 마일리지 등록 등 절차를 한 후 한자리에 모여 김창희 목사님이 기도를 함으로써 이번 여행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13. 이제 이번 여행의 의의를 찾아보면서 기행문을 맺고자 한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기는 참으로 긴 시간을 걸려 마무리할 수 있었다. 너무 갈고 구경한 장소가 많을뿐만 아니라 자세히 메모를 하지 못하여 후에 여행기를 쓴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특히 귀국한 후로 여러 가지 일로 바빠 집중해서 쓸 수 없어 무려 3개월 20일이나 지난 2014. 1. 16. 오늘에야 기행문을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행문을 쓰는데 있어서 구여혜 권사님이 조사한 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었는바,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린다.

첫째, 이번 여행은 서울홀리클럽 주체로 크리스찬들만 함께 여행했다는 점에서 많은 의의가 있었다. 불신자들과 함께한 여행은 아무래도 영적으로 불편한 점이 있으나 이번 여행은 그러한 문제가 없어서 좋았고, 특히 서울홀리크럽이 정체성, 조직 등의 몇가지 문제점으로 그 발전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잇어서 아쉬웠는데 단합된 모습으로 여행을 마쳤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다만 꼭 함께 가기를 바랐던 최현호회장과 오혜영 사모님, 그리고 장혜숙 권사님이 가정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둘째, 그동안 성경에 쓰여 있는 여러 지명들의 위치를 몰라 읽을 때마다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실제 지명을 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니 성경의 기록이 입체감과 현실감있게 머리와 마음에 닿아 좋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경로와 예수님의 사역 현장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역사의 생동감있는 현장을 느낄 수 있었고,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와 배경을 알게 되어 성경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세째, 같은 중동지방의 국가이고, 기후나 자연조건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이집트,이스라엘, 요르단의 생활수준의 격차를 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과 그렇지 못한 백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집트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의지하는 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후진빈국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이스라엘은 좁은 땅에 항상 전쟁의 위험속에서도 높은 생활수준과 경제력을 보면서 이땅에서도 분명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살 수 없음을 느끼게 한다.

넷째, 이번 성지순례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기독교이 성지인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에 기독교 인구가 너무 적다는 점이다. 하루 빨리 이곳에 복음이 편만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현장에 당시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기념될 만한 장소에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세우고 그후 개축한 기념교회가 곳곳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기념교회를 세우기 보다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보존하고, 보존이 어렵다면 이를 고증하여 복원하는 형태로 남겨두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다. 예컨대, 골고다의 언덕에 교회를 세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형태의 유적이 남아 있다면 더욱 실감나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헐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섯째, 그러나 한편,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당시의 흔적을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모세 등 인간은 물론 비록 하나님이신 예수라고 하더라도 이생에서의 흔적은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아니 오히려 인간들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커다란 무덤이나 궁전, 성들을 남기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어렴풋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베드로전서 1장 24절, 25절의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는 말씀이 새삼스럽게 내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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